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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이혈 조선 초기 마지막 성군

quickforinformation 2023. 3. 20. 09:10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적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후 두달만에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세손이었던 성종이 아닌 옥좌는 해양대군에게 넘어갑니다.

8대 임금으로 즉위한 예종은 재위 1년만에 갑자기 승하하면서 9대 임금으로 거론될만한 인물이었던 월산대군과 제안대군, 성종 이렇게 세명이 있었으나 이들 모두를 누르고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지목을 받아 9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 친형인 월산대군이 아닌 차남이었던 성종이 임금이 됩니다. 정희왕후의 안목이 뛰어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종은 세조때 발생한 여러 폐단들은 물론 유교정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고, 실제로 정치작 유산 및 치적을 많이 남긴 인물입니다.

성종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는데, 실제 즉위할 당시의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치세기간은 25년, 즉 조선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평이한 치세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위기간이 평범했으나 성종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10대 임금인 연산군의 폭정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성종의 생애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성종은 궁밖에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군호는 잘산군입니다. 실제 왕위계승 서열권은 3위에 불과했는데, 조선의 법리상 예종이 승하하면서 옥좌를 물려받을 인물은 제안대군이었으나 너무 어린 나이가 걸림돌이 되었고, 친형인 월산대군은 심신이 병약하여 임금으로 추대받기에 애매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능력은 물론 건강까지 완벽한 잘산군이 차기 임금으로 거론되는데, 이는 당시 권신이었던 한명회가 장인이었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9대 임금으로 즉위한 성종은 당시 나이가 13세에 불과했으므로 수렴청정이 필요했고 이때 정희왕후가 실행한 수렴청정이 조선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수렴청정입니다.

성종의 즉위는 예종이 승하한 날 바로 거행되었는데 이는 취약한 정통성을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자이긴 했으나 실제 임금으로 즉위를 하지 못했으므로 정통성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실제 임금이 승하한 후 약 일주일의 시간동안 기다렸다가 즉위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를 깨고 서둘러 즉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종이 즉위한지 7년이 지났을 때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시작했으며 초반부터 성종의 목표는 세종의 치적을 계승하여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세조가 시작했던 경국대전을 완성해서 반포했으며 여지승람이나 악학궤범, 동문선과 같은 여러 서적을 편찬합니다. 또한 세조때 사라진 집현전을 대신할 홍문관을 신설하고 독서당 제도를 시행해서 인재를 육성하는데에도 큰 힘을 쏟게 됩니다.

학문외에도 국방부문에서는 여진족의 소탕이나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이룩하였습니다.

성종의 업적

친정을 시작하면서 여러 업적들을 많이 쏟아내는 반면에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사림파를 적극 등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세조에게 미움받아 좌천되었던 김종직등이 중용되었습니다.

성종대에 이르러 인재등용과 문화의 발전으로 조선은 다시한번 전성기에 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체제는 모두 성종대에 완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정책이 좋을수는 없는지 성종이 시행한 법 중 과부 재가 금지법은 조선 후기까지 유효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종은 유교정치를 이상적으로 실현한 임금으로 평가받는데, 친정을 시장하면서 원상제를 격파하고 경연에서의 대신 참여를 줄이는등 대신을 견제했고 이는 큰 소득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조때 발생한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성종대에 해결되고 있었으나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키운 세력인 대간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는 부작용도 발생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간의 권력을 축소하기 위해 다시 대신들을 중용하며 밀어주는데 이 일은 마무리가 되기 전에 성종이 갑자기 요절을 하면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성종대에는 군사력이 약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당시 여진족 사이에서 조선은 강대국으로 인식이 되고 있었고 실제 여진과의 전투에서도 여러 소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건주위 정벌 파병, 니마차 올적합 원정, 간도 개척시도, 삼봉도 개척 시도등 군사부문에서 여러 업적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종은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상당히 총명하고 관인, 공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성격또한 매우 온순하며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이었습니다.

백성의 삶을 직접 보고 챙기기 위해서 미행을 많이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실제 실록에 남아있는 자료가 아니므로 공신력에 어느정도 제한이 있으니 어느정도 걸러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유교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경국대전을 반포한점등은 충분히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단점은 과부재가금지법을 시행한 것으로 재가녀의 아들은 문과 시험에 응시를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 법이 조선 후기까지 유효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의 어진 성향은 실록에도 잘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동물을 좋아해서 여러 동물을 많이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양이나 개는 물론 사슴, 노루, 매 그리고 선물받은 원숭이나 백조까지 궁내에서 길렀다고 합니다.

위에서 알아본 성종의 모든 업적과 성향들이 저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연산군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 된 연산군은 폭군이면서 암군이기 까지 했으니 아버지인 성종또한 그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종이 살아있을 때 연산군의 모습은 상당히 평범한 수준으로 학문을 열성적으로 임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더라도 많이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실제 성종은 대간들의 힘을 키웠으나 이들을 제대로 견제할 장치를 마련하지 않아서 재위기간 내내 항상 걸림돌이 되었던 것을 보고 자란 연산군은 신하들을 휘어잡아야 제대로 된 왕권을 구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 싶습니다.

결과는 다음문서에서 다루겠지만 어쨋거나 성종은 연산군의 아버지라는 칭호만 제외한다면 세종에 비견될만한 성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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