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9대 임금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조선역사상 폐위된 후 복원되지 못한 두명의 임금 중 한명입니다. 폐위되었기에 묘호를 받지 못했으며 헌천홍도경문위무대도왕이라는 존호만 있습니다.
성종과 폐비 윤씨의 적장자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 폐왕이라고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고려시대 충혜왕과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의 역사인 탓에 충혜왕보다 인지도는 월등히 높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성종 다음으로 즉위하여 재위기간 초반에는 꽤 괜찮았던 임금이었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전혀 관련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숙청했고 향락과 사치에 빠져 국정을 태만히 했습니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된 후 유배를 떠났으며 유배지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적당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을 억눌렀다면 천수를 누릴 수 있었으나 스스로 성종의 치세기간동안 봐온 왕권약화에 대한 집착이 스스로 폐위될 여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산군의 생애
아버지 성종은 정통성이 약했으나 연산군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정통성이 꽤 확고한 인물 중 한명입니다. 장남인데다가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궁궐에서 태어나 왕위를 계승한 첫번째 인물이기도 합니다.
재위기간 초반에는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여 문신들의 학습을 장려했으며 상설회의, 병기개량등을 증축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인 성종의 말기에 느슨해진 신하들을 휘어잡을 정치욕도 있었고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임금으로써의 자질을 충분히 인정받았습니다.
따라서 재위기간 4년까지는 큰 문제없이 치세기간을 가졌으나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모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대간의 간언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아버지인 성종은 심성이 착했으므로 대간들의 간언도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지만 문제는 연산군에게 그럴만한 인내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연산군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임금이었습니다. 향후 나라의 향방이 정해질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임금이었으나 이를 제대로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판은 사림파와 훈구대신들이 극심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임금의 덕목과 안목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으나 연산군은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스스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두차례의 사화를 일으키면서 스스로를 옥죄게 됩니다.
특히 연산군이 재위하던 시절 사림파와 훈구대신들은 각각의 명분으로 충분히 임금이 휘어잡을 수 있는 정도였으나 도를 지나친 옥사로 인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폭군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 후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기록에는 연산군이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실제 이미 즉위하기 이전부터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폐비 윤씨가 사사당할때 이미 연산군의 나이는 7세로 충분히 상황을 인지할 수 있을만한 수준이었고 세자로 있을 당시에도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폐비윤씨의 이야기가 거론된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연산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폭군이 되었다는 사실과 달리 연산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이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성종이 키워 놓은 삼사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져있어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연산군은 실제로 아무나 숙청을 한 것이 아니라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나른 이세좌를 숙청하고 이후 광주 이씨와 관련있는 모든 가문을 숙청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석을 해본다면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일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바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안 것 처럼 행동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어머니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대간을 숙청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며 이후 때를 기다리다가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과정으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연산군의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삼사와 훈구대신들은 모두 허우대만 멀쩡한 수준으로 전락했고 강화된 왕권을 이용해 마음대로 국정을 논할 수 있던 연산군의 행보는 더욱 더 심각해지게 됩니다.
당시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이때 증가한 세율로 인해 백성들은 1년간 노력한 농사의 결과물을 모두 세금으로 빼앗기고 산나물로 연명했으나 이것이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들은 연산군이 산나물까지 채취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완전히 막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처럼 절대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총애하던 신하들까지도 이유없이 숙청하기 시작했으며 이유없이 협박을 하는 일도 잦았다고 합니다.
이에 신하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반정에 가담해야 했으며 당시 백성들의 상황은 높은 세금과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금표 제도등으로 인해 민심도 흉흉해진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누구라도 일어난다면 쉽게 거기에 동조해서 임금을 끌어내리는데 동조할 정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으며 그곳에서 몇달 뒤 사망하게 됩니다. 중종반정이 성공한 이후 연산군의 어린 자식들도 모두 사사되거나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 했으므로 연산군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갑자기 사망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왕이 아니므로 왕릉이 아닌 일반적인 묘로 구성되어 있고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했습니다. 10년정도의 재위기간을 가지면서 스스로 폭군이라는 인식을 했으나 자중하지 못하여 폐위된 연산군은 반정이 일어나기 10일전에도 이미 반정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장녹수와 전비에게 이르기를 반정이 일어난다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물건을 하사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스스로 짓고 있는 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이후 본인의 가족도 화를 입을 것임을 미리 예측했다는 것입니다.
반정이 일어나 옥새를 요구하는 일에도 순순히 내주었다고 하며 본인의 죄를 부정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연산군은 폭군이기는 했으나 완전히 미치광이는 아니었고,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바로잡지 못해 폐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