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성종의 적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연산군과의 관계는 이복형제, 즉 임금이 될 수는 있으나 왕위계승 서열에 의해 이복형인 연산군에 밀려 임금이 되지 못했으나 이후 폭군에 시달리던 신하들에 의해 반정이 일어났고, 옹립되어 11대 임금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중종입니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반정이 일어났으며 이 반정이 성공해서 옹립된 첫 임금으로 신하들의 필요에 의해 옹립되었으므로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기에는 상당히 큰 어려움이 많았던 임금이기도 합니다.
즉위한 이후에도 반정에 가담했던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신진사림파를 비롯한 조광조등을 등용했으나 실패했으며 재위기간이 38년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반정공신들의 등쌀에 밀려 본인의 왕권을 지키기도 벅찬 인물이었습니다.
폭군이긴 했으나 능력자체는 있었던 이복형인 연산군에 비해 애초에 임금이 될 그릇이 아니었던 중종은 우유부단하고 나약했으므로 사실 운이 좋아 임금이 된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되기 전 중종읜 진성대군으로 불렸으며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연산군과는 이복형제지간입니다. 임금이 된 형은 폐비의 아들이었으니 후처의 소생인 본인은 대군이었으므로 향후 연산군의 재위시절에 권력다툼에서 숙청 될 여지가 다분했으나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고 연산군이 재위하는 기간 내내 조용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연산군의 재위기간이 약 11년에 달하므로 그 기간내내 숨어지내다가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정이 성공하면서 임금으로 추대됩니다. 이때 진성대군의 나이는 19세였고,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즉위 이후 반정 공신들을 우대할 수 밖에 없었으며,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 그러니까 신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7일만에 폐비해야했습니다.
특히 반정공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옥좌를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낼 정도로 왕권이 약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 정통성이 확고하지 못한 것과 동시에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중종의 치세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훈구대신들의 권력이 계속해서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을 적극 등용했으나 조광조마저 중종의 명을 제대로 받들지 않았고 이후 기묘사화까지 일어나면서 사림이 대거 숙청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중종의 입장에서는 다시 훈구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게 되는등 왔다갔다하는 정치가 중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때 왕권이 약해지면서 일어난 김공저의 옥사와 이과의 옥사가 일어났으며 이 사건들로 하여금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왕권이 약해질대로 약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후 중종의 치세기간은 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됩니다. 권력을 잡은 권신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이일 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김안로가 작서의 변을 일으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가 다시 김안로가 몰락하자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일파가 득세하는등 중종은 애초에 본인의 의지대로 정치를 해본적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묘사화 이후 남곤이 집권하는 기간인 8년동안 그나마 안정되었던 치세기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곤이 없어지고 심정과 이행이 제거당하기 까지의 4년동안은 과도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이후 김안로가 집권하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때 중종은 본격적으로 김안오레 힘을 실어주기 위해 동지경연사를 포함한 총 8개의 관직에 제수하면서 밀어주게 되지만 김안로의 성격은 보복을 반드시 해야하는 성격이므로 김안로가 집권한 6년동안은 그야말로 공포정치가 다시 시작되는 기간입니다.
중종에 대한 평가는 이렇듯 왕권이 약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한 중종의 치세기간에는 안으로는 권신들의 횡포에 기를 눌렸으며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급급했던 시대입니다. 세종과 세조시절에 평정되었던 여진족들이 다시 북방에서 침략과 약탈을 시작했으며 아래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큰 왜구의 침략이 바로 삼포왜란으로 이때 비변사가 생겨났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안과 밖으로 모두 수난을 겪은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업적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조광조를 등용했을 시절에 향약을 전국적으로 권장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으며 다양한 서적을 반포하고 군적을 개편, 전라도 및 평안도, 강원도에서 양전사업을 시행하고 북방의 진을 보수하는등 여러방면으로 업적을 남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과 나약했던 심성때문에 항상 권신들의 횡포에 눌려살아야 했으며, 옥좌를 교체한다는 뜻을 내비치고도 목숨을 부지했던 권신들을 보면 왕권이 상당히 약해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중종은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을 근거로 시작하지만 실제 이러한 모습은 중종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계책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조광조를 등용했다가 그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일으켰던 기묘사화, 그 이후 남곤, 심정, 이행을 등용했다가 이후 김안로를 등용하는등 권신들의 권유에 따라 신하들을 몰아냈으나 조광조나 김안로를 숙청하는 과정에서는 중종이 직접 관여를 하는등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 임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종이 보여준 애민정신만은 높게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인데, 항상 백성들에게는 따뜻하고 인자한 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중종 28년에 일어난 어린 노비 아이가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직접 국문을 주도하며 범인을 찾아내는 동시에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라며 해당 노비 아이를 직접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의녀였던 장금을 어의로 임명하는 등의 면모도 있었으며 노비출신의 반석평을 판서에 임명하는등 개방적인 면모를 가진 임금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