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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이연 부도덕했던 왕

quickforinformation 2023. 3. 28. 08:31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는 조선 왕실 최초로 적통이 아닌 방계 출신의 임금입니다. 중종과 창빈 안씨의 차남인 덕흥군의 삼남으로 태어나 하성군에 봉해졌으며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후계자로 선택되어 14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초반에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친정을 시작했을 때 이미 정치력이 뛰어나서 조정을 무난히 휘어잡았으며 이후로도 국정에 관해서는 상당히 숙련된 이미 제왕학을 공부한 것처럼 막힘없이 풀어나갔다고 합니다.

당시 선조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점과 병폐, 한계등에 대해서 개선방안을 많이 만들었으며 실제로도 조선 역사상 중간에 위치하는 임금으로 선조이후로 즉위하는 모든 임금들은 선조의 직계후손입니다.

또한 선조대에 이르러서야 태조인 이성계의 족보를 잘못 기록한 명나라에 수정을 요구해 고쳤으니 이것이 바로 사대를 했던 조선과 성리학 유학계의 숙원을 풀어낸 것으로 종계변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데 이는 아래에서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선조는 유능했으나 도덕심이 결여되어 있는 임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나라의 수장보다는 사업가가 어울린다는 표현이 적절한데 임진왜란을 겪을 당시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왕으로써의 책임감을 전혀 다하지 못하면서 백성들에게 심어준 이미지는 최악에 가까운 암군이기도 합니다.

즉 상당히 두뇌가 명석했으므로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본다면 대의명분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정치를 했으며 조선의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하들을 모았습니다.

어쨋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서 선조를 보았을 때 방계혈통중에서도 왕위계승서열에 밀려 실제 임금으로 즉위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던 하성군이었습니다.

이유는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은 중종의 9남이었으며 서자인데다가 본인은 그 사람의 3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제까지 조선에서는 방계혈통이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없었으며 실제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당시에도 후계선상에 오른 종친 중 하나였으나 왕의 아래항렬에서 후계자를 뽑아야했기 때문에 선조가 발탁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적자와 서자에 차이가 엄격했으나 왕실에는 다소 사대부들만큼의 차별이 있지 않았으므로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즉위했을 당시 나이가 어려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나 불과 1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게 되는데, 이를보면 선조의 명석함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즉위 초반에는 선조의 부족한 정통성을 바로 잡기 위해 사림을 끌어들였으며 명종의 치세기간동안 내정을 장악한 폐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명석한 두뇌에 맞지 않는 도덕심

그러나 16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했고 세자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제대로 된 제왕학을 교육받지도 못한 선조가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무리가 있었을 겁니다.

특히 왕조가 지속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인순왕후의 지명을 받아 즉위했으므로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나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또한 선조의 치세기간 중반쯤에는 임금으로써 가져야할 정치적인 덕목이 어느정도 자리잡았을 때 신하들을 편가르는 당쟁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선조의 정치적수완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으로 기축옥사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볼 수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거듭되는 패전속에 선조는 신립에 8천의 군사를 맡겨 왜군의 격퇴를 명하지만 신립의 지휘력 부족으로 참패를 당하고, 이후 몽진을 결정하여 세자신분이었던 광해군에게 왕권의 일부를 위임하게 됩니다.

이후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길에 오른 선조는 명나라로 가고자 했었는데, 고려시대의 몽골전쟁이나 거란전쟁때처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왕실의 행동이었다면 선조의 행동이 비난만 받을 수는 없겠으나 실제 선조의 행동은 이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애초에 몽진길에 오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백성과 조선이라는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로 망명을 공식 요청하는데, 이에 명나라는 선조가 몽진하는 속도와 군사를 통제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왜구와 합작해서 명나라를 치려는 속셈이라고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 압록강의 배를 요동쪽으로 철수시키는등 망명을 거부했고 이에따라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의 목적은 무산되어버리고 맙니다.

이와중에 임금의 파천을 알게 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지르는등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와중에도 광해군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왕족으로써 지켜야할 체면과 자존심따위는 챙기지 않은채 전국 각지에서 민폐만 끼치고 다닌 기록도 존재합니다.

부족한 정통성

이외에도 이몽학의 난이 벌어지면서 백성들이 규합해 세가 순식간에 수천으로 커지자 이에 불안함을 느낀 선조는 인순신을 의심하여 백의종군하게 하였고, 대체자로 찾은 원균의 제대로 된 능력을 검증하지도 못한채 칠전량 해전을 벌이게 하면서 조선 수군이 더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이순신의 백의종군이 바로 전쟁중에 일어난 숙청이라는 점인데, 물론 원균의 진정한 능력을 알지 못하고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과 다시 이순신을 복권시킬 때에도 스스로 실수를 했다는 점만 부각시켰을 뿐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칠전량 해전이 대패하게 된 원인이 원균에게만 쏠려있는 것과 달리 사실은 선조가 제일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원균은 칠전량 해전을 거부했으나 선조가 협박까지 하면서 내몰았고 결과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대패하게 됩니다.

게다가 전후 논공행상에서 원균을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했으며 이때 근거로 내세운 말이 바로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일등공신에 예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큰 그림으로 본다면 원균이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는 것은 본인도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파천했으나 명나라에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는 것을 에둘러 설명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몽진할 당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거듭되는 광해군의 항전 활동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자 본인의 왕권을 빼앗길까봐 불안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전쟁중에 있음에도 거듭되는 양위소동을 벌여 세자의 위신을 깍아내렸으며 당연히 생전에 양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동속에 기록을 하던 사관조차 선조가 양위를 선언하면 이를 말리지 않고 내버려둬야 한다는식으로 기록하여 비아냥거렸으며 광해군의 입장에서도 선조와 인목왕후사이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아버지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지게 됩니다.

당시 광해군을 지지하던 세력들은 소북을 제외한 모든 신하였으므로 세자지위가 위태롭지는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조는 똑똑했으나 도덕적이지는 못했고 유능한 두뇌를 활용하여 본인의 안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한 암군이라는 평가가 어울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적이 다소 과소평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여진정벌은 선조의 대표적인 치적 중 하나이며 정치적 역량과 인재등용, 전쟁대비, 전후 처리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으나 이순신을 박대하고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거나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린점등은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한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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