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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공빈 김씨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광해군은 동복형 임해군이 있었으나 상당히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일찌감치 선조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는 낙점받지 못했으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조활동으로 전장을 누비며 전쟁영웅으로써의 행보를 보여준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즉위하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인 선조가 파천을 하여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할 때에도 백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쓴 광해군을 지지하는 것은 신하나 백성이라면 당연한 일 이었을 겁니다.
그가 폐위를 당한 이유
그러나 즉위이전까지는 성군의 면모를 보여주며 기대에 부응했으나 15대 임금으로 즉위하고 난 뒤에는 왕권을 무리하게 강화하고자 하는 집착증세를 보이면서 중신들의 반발을 사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강제로 폐위당하게 됩니다.
유년시절부터 노년시절까지 상당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광해군은 현재까지도 업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임금 중 하나이며 때에따라 이념적인 투영이 많이 투사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간혹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광해군이 세자로 간택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으나 실제 조정의 여론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광해군이 대세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의 활약에 선조는 왕권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아버지인 선조가 전쟁중에도 양위소동을 일으켜 세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군의 위신을 깍아내렸으며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이용해 견제까지 받는등 많은 역경을 헤쳐온 인물입니다.
그러나 선조의 견제는 광해군의 위신에 전혀 해를 가하지 못했는데, 영창대군이라는 존재는 사실 선조의 입장에서 임금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애초에 광해군은 종법의 예에 따라 영창대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어쨋든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세자가 아니었으나 도성이 함락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는데 이때 책봉한 위치가 피난길이었습니다.
특히 영변에서 선조가 광해군에게 조정을 맡긴다고 하여 왕권의 일부를 이임하고 양위소동까지 벌이게 됩니다. 당시 광해군의 나이는 18살,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권을 위임받은 광해군은 곧바로 남쪽으로 향해서 왜구가 진을 치고 있는 강원도 이천으로 향하는데 당시 광해군의 활약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 이성계와 정종을 제외하고 왕실의 종친들이 직접 전쟁에 나가 싸운 경험이 있는 왕은 광해군이 유일합니다.
상황이 이런식으로 전개되다보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신하들 사이에서도 광해군의 활약을 칭송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선조의 왕권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조를 위협했던 광해군의 권위
게다가 명나라에서도 직접적으로 조정에 관여하여 선조 대신 광해군을 임금으로 삼고자 하는 행동을 취했으며 선조의 다른 아들 중 임해군과 순화군이 전국 각지에서 민폐를 끼치자 백성들이 왜군들에게 왕자들을 넘기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당연히 왕실의 일원으로써 보여준 광해군의 행보에 감명받은 백성들에게는 왕실의 이미지 제고는 물론 향후 즉위했을 때 본인의 치세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될만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선조의 견제는 날이갈수록 심해지는데 애초에 선조에게는 광해군을 제외하고 후계자로 삼아 견제할 만한 패가 없었습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이미 만신창이 신세가 되어 왕실의 일족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처형당했을 수준이었고, 당시에는 영창대군이라는 존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창대군의 등장
실제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목왕후를 맞이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영창대군입니다. 선조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광해군을 견제하려 했으나 애초에 영창대군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며, 왜란동안 쌓은 광해군의 공이 흠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견제하지도 못했습니다.
광해군의 즉위 선조 말기에 건강상의 문제로 세자가 있음에도 후계에 대한 확정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죽기직전이 다 되어서야 광해군을 후계로 확정하고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교지를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즉위하는 과정이 상당히 매끄럽지 못했는데 탁소북의 영수라는 권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서 선조가 내린 교지를 감추어 왕위 계승을 교란시켰으나 인목왕후가 언문 교지를 통해서 광해군의 후계 확정을 공지하고나서야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백성은 물론 신하들까지 두팔벌려 환영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보여준 선조의 모습은 일국의 왕이라고 할 수 없을정도로 엉망이었으며 그에 반해 전장을 누비며 활약을 한 광해군이 즉위하니 지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즉위한 이후 광해군의 행보는 이전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치세기간 초반부터 왕권에 상당한 집착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수많은 옥사를 벌이면서 붕당간의 균형은 깨졌으며 이때 대북이 권세를 잡고 패악을 부리게 됩니다. 특히 대북파의 힘이 너무 커져버린 광해군은 권세를 잡은 이이첨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평소 총애하던 허균이 숙청당할 때에도 광해군의 말을 듣지 않고 이이첨 독단으로 허균을 처형하는등 이미 왕권을 넘어선 권력을 휘두르는등 막장행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붕당간의 균형을 선조는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서로 이간질하게 하여 맞추었으나 광해군은 이러한 정치력이 결여되어 있어 권력이 한쪽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광해군의 집착
이후 광해군은 옥사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대북파의 권력을 거둬 들이며 서인세력들에 대한 경계를 풀었으나 이렇게 경계를 풀고 대북파의 권력 회수에만 몰두한 결과 반정이 일어난 당일 밀고마저 일축함으로써 인보반정이 성공하게 됩니다.
특히 이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조금만 더 눈치가 있었더라도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어거지 성향의 반정이었으나 스스로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붕당간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자초한 일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조반정
조선 역사상 두번의 반정이기 때문에 이전에 연산군을 폐위하기 위해 일어났던 중종반정과도 비교할 수 있는데, 사실 두 반정은 결이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폭군이었던 연산군을 끌어내리기 위해 일어난 중종반정은 그 명분이 확실하여 백성들에게도 지지를 받았으나 광해군을 끌어내리기 위한 인조반정은 폐모살제라는 명분이 애초에 사실에 기초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므로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공했기에 이정도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지 실패했다면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폐모살제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애초에 명분이 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폐모살제 중 폐모는 실제로 인목왕후를 폐위하여 궁에 가둔 것이 사실이나 동생을 죽였다는 것에는 근거가 없고,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강제로 폐위하여 감금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반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광해군의 업적
즉위한 이후 정책적으로는 대동법을 시행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으며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실시했으나 스스로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실록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대동법이라는 것이 전례가 없던 정책이기도 하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냐는 것에 강한 의문을 품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당대에도 반발이 심했던 대동법은 약 100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자리잡고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후 복구를 통해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동의보감을 발간하는등의 업적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국동국여지승람등을 재간하여 보급한 것도 업적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광해군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외교부문으로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번의 옥사를 벌인점과 공사를 지나치게 지속 했으며 이는 곧 민심이 악화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전쟁의 영웅이었던 광해군이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는 것은 그 막장행보가 극에 다다랐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광해군은 즉위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강력한 왕권을 구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겠지만 스스로 왕권에 대한 노이로제가 대북파의 이이첨을 독주할 수 있는 결과로 만들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궁궐을 계속해서 증축하면서 공사가 길어지자 백성들을 수탈하게 됩니다. 이 공사가 어느정도였냐면 후금의 황제였던 누르하치가 조선의 통사에게 궁궐 공사를 많이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사실여부를 물었다는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어쨋든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치세기간 후반에는 대북을 견제하였고 이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려 했으나 서인 일부세력이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반정을 계획했고, 이를 소북이 방관하고 남인이 방조하여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으로 끝나게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방관 및 방조인데, 만약 하나의 세력이라도 광해군에게 밀고를 했다면 반정을 절대 성공할 수 없었으며 반정에 가담했던 인물은 물론 추후 인조가 되는 정원군까지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낸 광해군이지만 스스로 왕권에 대한 집착과 미신을 신봉하면서 폐위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폐위 이후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청나라에서 광해군 폐위를 명목으로 조정에 간섭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후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후 그곳에서 4년 4개월만에 승하하게 되며 당시 나이가 66세로 조선에서 네번째로 장수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성군이 될 자질과 무리한 왕권강화를 진행하지 않아도 백성과 신하들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임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