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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종 복수, 그리고 반정

quickforinformation 2023. 3. 30. 08:30

조선역사상 네번째 반정(1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으로 옥좌를 차지한 16대 임금 인조는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여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선조의 5남이었던 정원군의 아들로 태어나 능양군에 책봉되었으며 왕위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인조가 즉위한 이후 시행된 여러 정책들은 조선 후기동안 계속해서 논의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기도 합니다.

왕족으로써 반정에 직접 가담한 인물로 신경진, 구굉과 함께 광해군의 재위시절부터 반정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므로 중종과 달리 반정의 주역으로 활동한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반정이 성공하고 인조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왜 폐위했냐는 반응을 보였으며 명목상 즉위 후 책봉을 받기 위해 명나라로 떠나는 길에 사신들이 산동에 도착하자 등주자사에게 임금을 축출한 역적이라는 욕을 먹으며 북경으로 가는 길에도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습니다.

반정 명분은 폐모살제

어쨋든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뒤 즉위한 인조는 치세 초반부터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집권을 위해서 대북파를 축출하고 폐모살제론에 소극적이던 소북 또한 숙청을 했습니다.

당시 서인들의 의견을 무시한채 소북 숙청을 실행하면서 인조반정에 협조했던 중북들도 숙청되는등 역효과가 많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괄의 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괄의 난이 발생한 이유는 반정 당시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혐으로 하옥하려고 하자 일어나게 된 일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괄의 위치는 부원수, 조선 북방의 경계를 책임지던 군대를 이끌던 통솔자 였으니 이러한 권력의 회수도 진행하지 않은 채 숙청을 시도해 후금을 위해 양성한 군사 1만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으며 당시 안주와 평양, 황주, 개성을 모두 빠른시간내에 함락하고 수도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특히 이괄의 난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이유는 국가 내에서 일어난 반란 중 수도가 점령당한 난은 이괄의 난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조는 파천하여 공산성으로 피신했으며 이괄은 흥안군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반란군이 안령에서 도원수였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하고 이천으로 퇴각하였으나 그 곳에서 본인의 심복들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이괄의 사망소식에도 불구하고 잔당들을 두려워하여 여전히 공산성에 머물렀으며 이괄의 목을 확인하고 나서야 공산성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이로 인해 북방의 경계가 허술해졌고 이괄의 부하들은 추후 후금에 편입되어 수도 한성까지의 지름길을 알려주는 등 조선에 상당히 큰 악재로 작용하게 됩니다.

결국 제대로 된 제왕학을 학습하지 못한 인조의 즉위 이후 행보는 허술한 숙청으로 인해 북방의 경비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핵심 인력들을 반란군 또는 청나라로 편입시켜 추후 정묘호란이 일어나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친명배금, 두번의 호란

그 다음 결국 후금에 의해 정묘호란이 발생하게 되니 친명배금정책에 의해 약 5년만에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천명제였던 누르하치와 숭덕제 홍타이지 시절 조선에 대한 정책을 이유로 정묘호란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시 반정으로 옥좌를 차지한 인조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운 후금은 북쪽에서 부터 여러 성들을 거치지 않고 기동성을 이용해 바로 수도를 공략하게 됩니다.

이에 조선군은 가뜩이나 불안정한 북방의 경비체계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으며 특히 조선의 친명정책에 대해 딱히 문제삼지는 않았으나 문제는 명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친명정책을 고수한 조선이 후금의 입장에서는 달갑게 보일리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호란 중 하나인 병자호란이 결국 1637년에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청나라의 군대는 압록강을 도하하여 조선을 기습했으며 당시 인조는 긴박한 상황속에 멀리 파천하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에 남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은 농성으로 버텼으나 식량문제로 인해 서서히 농성도 힘들어지고 있었으며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각지에서 출발한 근왕군들은 청군에게 쌍령전투등으로 각개격파되었고 압도적인 우세를 자랑했던 근왕군조차 청의 기동술에 밀려 패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때까지 근왕군들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으며 원인은 이괄의 난이 발생하고 난 후 중요한 지점에는 중앙의 측근들만을 기용하며 국내감시가 미흡했던 인조의 문제였는데 특히 도원수 김자점과 장신, 김경징과 같은 무능력자들을 임명한 것은 적어도 이 인물들은 반란을 일으킬 만큼 명석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쨋든 인조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사령관을 잘못 임명한 것이지만 조선의 군대를 훈련하는 과정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결국 남한산성에서 40일간 농성하며 버틴 인조는 믿고 있던 근왕군도 계속해서 청군에 패퇴당하며 희망이 사라지자 성밖으로 나가 주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조건으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고 군신의 관계를 맺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한반도 역사상 오랑캐에게 최초로 머리를 조아린 최대의 굴욕중 하나로 학교에서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는 내용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왕권은 그야말로 바닥을 쳤으며 여러 왕자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씨 왕조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왕권이 떨어지자 정권이 붕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리학 종법 질서를 강화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고 있었으며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아래 평생 수절을 해야했습니다. 게다가 약해진 왕권이 회복되는 시기는 효종과 현종의 시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회복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삼전도의 굴욕이 조선에 미친 영향이 어느정도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조는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스스로 왕위를 욕심냈으나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스스로도 명석한 두뇌를 가지지 못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왕족 중 왕위 계승서열이 높은 사람들은 제왕학은 물론 힘든 조기교육을 감내해야하는 반면에 인조에게는 이런것들이 전혀 없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반정으로 임금이 되어 한나라의 수장이 아둔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 잘 보여주는 선례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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