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효종은 인조가 시행했던 각종 정책들의 시행착오를 제대로 계승해서 시행했으며 두번의 호란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조선을 복구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키는데 업적을 세운 중흥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효종이라는 묘호가 송나라의 효종 황제와 홍치제가 받았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시 효종의 업적은 그가 남긴 치적들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우수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효종에 대한 평가는 계속된 연구에도 크게 달라진 부분 없이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광해군이 재위하던 시절 능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친어머니는 인열왕후입니다. 인조가 반정으로 임금이 된 후 8살에 봉림대군에 책봉되었으며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세자를 잘 보필했다고 합니다.
그 후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영구귀국을 하고 얼마안있어 소현세자가 갑자기 요절하고 그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아버지인 인조가 승하하자 그 다음날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의 대신들은 모두 탄핵을 당했으며 인조의 유언에 따라 김자점과 이시백을 따로 처벌하지는 않았으나 조정에서 완전히 실각시키게 됩니다.
당시 조선의 모습
이는 김자점에 병자호란때 인조의 명을 받들어 청나라군대와 싸우기 위해 평안도에 있었으나 청군이 평안도를 비롯한 여러 성들을 그냥 지나치고 수도를 공략하자 근왕군을 파견하기 보다는 술판을 벌이며 놀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효종의 북벌지계가 실제로 시행되고 있었던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으며 당시 청나라의 위세를 생각해본다면 즉위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효종이 무리하게 북진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미약합니다.
북벌론?
따라서 즉위이후에 두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망가진 조선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으며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을 단행하는등 여러가지 시스템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쨋든 북벌에 대한 의지는 어느정도 있었으나 시대적 상황이 뒷받침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북벌을 진행하기 위해서 송시열을 필두로하는 산당과 손을잡고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만 송시열은 실제로 불벌에 소극적이었으며 효종의 북벌론을 설파할때에도 수신만을 권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이르러 연구된 바에 따르면 북벌론은 그저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대세입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낸 임금이지만 의료사고로 인해 사망한 임금인데, 당시 효종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어의들이 의논을 하게 되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치료하자는 신가귀와 목 위로는 침을 경솔히 사용할 수 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갈리게 됩니다.
사망 원인
이에 효종은 신가귀의 의견을 존중해서 침을 놓게 되는데, 이때 신가귀의 수전증 때문에 침이 혈락을 범하였고, 결국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지자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효종은 두번의 호란으로 망가진 조선의 경제시스템은 물론 군사력을 증강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임금이며, 이외에도 민생을 돌보는등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며 의욕적으로 정치를 했던 임금입니다.
게다가 남한산성을 보강하여 내부의 방어체계를 재정비했으며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할 때 청군에 의해 근왕군이 격파당하는 쌍령전투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들의 훈련체계도 정비하고 강화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바로 전세계적으로 조선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조선의 성군으로 세종과 정조, 효종을 꼽는 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북벌론의 현실성
그러나 익히 알려진 북벌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평가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위세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국력이 상당히 융성했던 시기이며, 효종 다음에 즉위하는 현종대에 청나라의 황제는 바로 강희제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효종이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기 보다는 단순히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는 시각입니다.
또한 효종은 소현세자의 사망으로 인해 임금이 되었으므로 정통성에 대한 문제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군비를 확충하고 무인을 발탁하는등 왕권을 강화하는데에도 신경을 썻지만 민회빈 강씨와 조카들을 추숭하자는 대신들에게는 상당히 단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는 현종대에 이르러 예송논쟁으로 불거지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글 현종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까닭은 대충 조선은 왕조국가였는데, 여기서 장자 국유론을 내세워 비정상적으로 보위를 계승한 효종에 대한 정통성을 문제삼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효종은 승하한 뒤에도 장례절차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미리 준비한 관의 너비가 어깨와 맞지 않아서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즉위를 하면 관을 미리 만들어 계속해서 옻을 덧칠해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는데 효종이 재위기간 동안 신체가 더 성장하면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에 널빤지를 잇대서 관을 늘렸으며 옷칠을 하여 잇댄 자국을 제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효종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영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세종대왕의 묘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