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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인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당시 외아들로 태어난 현종은 출생지가 심양으로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태어나 즉위한 임금입니다.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재위기간동안 예송논쟁에 휘말렸으며 이를 현명하게 잘 풀어나가면서 정치력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예송논쟁이라는 정쟁때문에 단명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현종의 재위기간은 15년으로 아버지인 효종의 10년보다 더 긴 기간동안 치세를 했던 임금입니다.

물론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33세까지 15년의 재위기간을 가졌으나 다소 어린나이에 승하했으므로 이러한 인식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종의 정통성

또한 정통성이 꽤나 확고한 임금 들 중 한명인데 왕세손과 왕세자, 임금의 과정을 모두 밟은 단종과 비슷한 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통성과 정치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휘둘렀으며 실제 아들인 숙종의 정치력보다도 한차원 더 높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고, 현종이 조금 더 오래살았다면 붕당간의 평화가 더 오래 갔을 거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즉위한 이후 민심을 다잡기 위해 오가작통제를 강력하게 제정했고 수리 시설과 양전 사업을 시작했으며 광해군시절부터 파탄난 조정의 재정상황을 수습하고 동으로 된 활자를 10만개나 주조하는등의 치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효종이 시작했던 북벌을 일시적으로 중단했으나 단지 정치적 이념을 계승하지 않은 것일 뿐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은 지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특히 화포를 개량하여 대량생산하는등 군비를 확장한 업적이 있습니다. 또한 소현세자와 비슷하게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혼천의를 개량하거나 자명종을 제작하는 것에도 힘을 썻으며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하고 문묘안에 계성묘를 세우는등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미약한 존재감의 원인은 건강

그러나 현종은 태생이 병약하여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 고생을 하는데 그 중에서도 피부병이 고질병으로 부스럼이 생긴자리에 고름이 생겨 재위기간동안 온천을 가장 많이 이용한 임금으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전란을 극복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전세계적으로 이상 저온 현상이 발생해서 곡물의 생산량이 많이 감소하였고 이는 곧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게다가 각종 전염병까지 돌면서 현종의 치세에 상당히 큰 흠결로 남을 뻔했으나 불안정한 민생을 돌보기 위해 꽤 많은 신경을 썻던것으로도 보입니다.

이 일을 경신대기근으로 기록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데 이 이전까지 효종부터 현종의 재위기간 초반을 살펴보면 당시 사치 풍조가 만연해있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호황 뒤의 불황이라 가히 대재앙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업적등을 남기면서 성군의 면모를 어느정도 보여줬으나 재위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예송논쟁이 그의 심계를 어지럽혔고, 경신대기근까지 발생하였으나 현종은 난관을 굳건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탓인지 잔병을 달고 살았다고 하며 결과적으로는 33세의 나이가 되던 해 승하하면서 아들인 숙종이 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사후 현종이라는 묘호를 받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내 숭릉에 명성왕후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후세에 이름이 다소 많이 알려진 임금은 아니었으나 예송논쟁으로 인해 서인중심으로 움직이던 정국을 붕당간 균형을 위해서 노력했으며 예송논쟁에만 국한하지 않고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력이 쇠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시행하면서 치적도 남겼습니다.

실제 그의 성격

더군다나 예송논쟁이 두번째 일어났을 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아버지인 효종을 장자로 확정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서인들의 기세가 한풀 꺽일정도였고 당시 거물급이었던 김수흥도 별다른 반문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예송논쟁 하나 때문에 상당히 저평가되고 있는 임금인데 세자시절 효종이 기르던 곰이 장성하여 말을 듣지 않자 이를 죽이라는 신하들의 청을 받아 명을 내리자, 현종이 당장 해치지도 않은 사람을 근거로 곰을 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식으로 얘기하자 효종이 크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종이 즉위한 이후 예송논쟁 대립이 격해지면서도 임금의 중재덕분에 죽은 사람은 없었고, 가장 큰 형벌을 받은 사람이 윤선도로 유배를 가는 것에 그쳤습니다.

또한 현종 이후로 이씨 왕조의 후손이 상당히 귀해지게 되는데, 아내였던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1남 4녀를 가졌으며 이 중 1남이 바로 숙종입니다. 이 이후로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하더니 아예 헌종때 단절되었다가 철종이 겨우 이었으나 그 다음으로도 왕손이 귀해지면서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아예 남과 같은 사이라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송논쟁과 경신대기근을 극복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치적이 많지 않으므로 대중성이 없는 임금입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생각했을 때 그만큼 정치를 잘해서 크게 화제가 될만한 일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송논쟁과 경신대기근을 잘 극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칭송받아야 하는 치적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인지도가 낮은 이유는 단명한 것과 숙종과 영조의 치세가 다소 눈에 띄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들인 숙종의 아내들보다도 못한 인지도를 가진 것이 아쉬운 임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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