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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 등장한 백전불패의 명장으로 망해가던 고려를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이성계입니다. 그는 고려말기의 권문세족과 왕권의 불안정함으로 인해 발생한 민심을 수습하고 정도전과 조준, 남은, 윤소종등의 신진사대부와 뜻을 모아 명분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성계를 축출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핑계로 출정하게 하나 이를 알아챈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출정에 반대했으나 끝내 요동정벌에 참가하게되고, 이후 모두가 잘 아시는 것처럼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면서 당시 고려의 임금이었던 우왕을 몰아내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약 4년동안 사전준비를 하면서 공양왕마저 쫓아내고 고려를 멸망시킨 뒤 조선을 개국하게 되는데, 이러한 백전불패의 명장도 어쩔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으니 임금이 된 이후에 벌어진 자식들의 골육상잔으로 인해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이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등 사건사고가 많았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글 아래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이성계는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즉위했으며 가장 장수했던 영조 다음으로 오랜기간 장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성계의 생애
본관이 전주인 이성계는 사실상 함경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본관이 전주인 관계로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건국한 뒤 전라도 전주를 이씨 왕조의 발상지로 정하고 그곳을 풍패지향으로 삼았습니다. 고려에 귀순하기 이전 이성계는 몽골 제국에 투항하여 천호장까지 오른 인물인데, 그만큼 이성계의 집안이 무골이었다는 증명이 되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몽골에서 다루가치라는 지위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몽골인이 아니었던 이안사가 이런 직위를 받은 것은 흔치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성계는 청년시절에는 원나라에서 천호장이 되었다가 원나라가 멸망할 때 즈음 고려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무신이 됩니다. 이성계에 관한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왕이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인데, 서까래 세장을 등에 지고 있었다는 것과 닭이 우는 꿈, 꽃이 있었으나 시들어버리는 꿈등 다양한 왕이 될 꿈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성계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특히 고려로 내응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상당히 큰 공들을 많이 세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나름 대가 굵은 전공만 나열하더라도 약 12개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으며 당시 이성계의 활약을 기록으로 살펴보면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백전무패의 명장이었습니다. 왜구는 물론이고 여진족, 원나라의 군대, 홍건적등을 모두 토벌했으며 공민왕이 진행했던 1차 요동정벌에서도 요동성을 함락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려사이후로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기도 한 업적입니다.신궁 이성계
전쟁에서 이러한 다수의 전공을 세웠음에도 한가지 더 막대한 능력이 있었는데 바로 신궁중의 신궁이라는 평가입니다. 그야말로 궁술만 따졌을 때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를 통틀어도 이성계에 비할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인데, 이 활솜씨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단순히 서서 쏘는 것 뿐 아니라 말을 타고 쏘는 기마궁술도 있으며 이는 대대로 무골집안인 이성계의 집안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이성계의 어진을 보면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가 상당히 넓은 그야말로 무인의 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노인이 된 60대 중후반에도 딸을 얻을 만큼 건강이 좋았으나 본인의 아들은 이기지 못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조선 1대 임금 이성계
이러한 부연설명을 제쳐두고라도 어쨋든 요동정벌을 명분으로 출정한 이성계는 성공한 뒤 돌아왔더라도 국가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을 것이고 만약에 실패했더라도 민심은 여전히 이성계를 영웅으로 추대했을 겁니다. 어쨋건 정적들에 의해 2차 요동정벌에 휘말려 출정했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의 개경을 점령하여 고려를 접수하게 됩니다. 이후 잘 아시는 것처럼 우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옹립했다가 또 그다음에 본인이 문하시중, 권서국사, 권지고려국사등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명나라의 재가를 받기 위한 일종의 관례로 왕으로 즉위하더라도 명나라에 허락을 받던 고려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 것 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왕으로 즉위한 뒤 고려를 없애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여 임금이 된 이성계는 여러가지의 업적을 세웠으나 결과론적으로 후계자를 책봉하는데 실수가 있는 임금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개국공신이었던 아들 대신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면서 무인정사 즉,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무튼 이성계는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이나 과전법 같은 토지 개혁법을 통과시켜 해결하였으며, 국방력은 물론 왜구의 침략을 대마도 정벌로 종식 시키는등 새로운 왕조가 지속될 수 있는 기틀은 확실히 마련했다는 평가가 대세입니다. 이러한 태생이 무골인 이성계도 말년에는 상당히 쓸쓸하게 보내는데, 이유는 바로 세자책봉 과정에서 실수로 인해 왕자의 난이 두차례나 일어나고 결국 정권을 잡은 이방원에 의해 상왕으로 몰려나고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세자 책봉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성계를 뒷바라지 해준 신덕왕후의 소생을 세자로 삼아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시절 변방 무신이었던 이성계가 개경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력자인 곡산강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컷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은 했으나 어디까지나 예와 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이러한 실수를 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쨋거나 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권력을 대부분 상실했고 아들 이방원이 스스로 왕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성계는 다음 수인 조사의의난을 준비하게 됩니다. 명명은 조사의의 난으로 했으나 실제 뒷배는 이성계라는 것이 중론이며 이 난에서도 아들 이방원에게 패한 뒤 아들과 화해하고 온천이나 절등을 유람하러 다니면서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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