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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과 명성왕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숙종은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불운을 경험하지 않고 즉위한 임금입니다.
아버지인 현종이 33세의 나이로 승하하면서 14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했으며, 당시 어머니 명성왕후나 할머니 자의대비가 있었으므로 수렴청정이 가능했으나 숙종은 이를 물리치고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왕권의 핵심
이것은 조선 왕조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15세를 성년으로 보았으니 14세인 숙종은 성년이 되기 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친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명성왕후나 자의대비는 물론 조정의 대신들까지 숙종의 총명함에 이견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장수하기 까지 했으며 확고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무수한 환국정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총 네번의 왕비를 들였는데 현재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숙종은 후궁의 수가 역대 다른 임금들에 비해서 수가 많지 않았으며 자식의 수가 많은편도 아닙니다.
아버지였던 현종이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본인도 현종의 정실 부인에게서 나온 외아들이었으므로 정통성으로는 조선 역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임금입니다.
역대 최강의 정통성
이는 단종이후로 나온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확고한 정통성을 가진 임금이었는데, 당시 모후였던 명성왕후(명성대비)가 생존해있는 상태에서 즉위했으니 수렴청정을 하지 않고 곧바로 친정을 해도 누구하나 숙종의 영향력에 제동을 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 정통성은 단순히 출생뿐 아니라 원손, 세자, 임금의 순서로 제왕학을 제대로 학습한 것에 기인합니다. 어릴적부터 몸은 병약했으나 성격만큼은 상당히 고약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세자시절 머리를 빗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 조차 싫어해서 명성왕후가 직접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조차 견디기 힘들어 하면 명성왕후가 숙종의 머리를 빗등으로 때려가면서 계속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성미때문에 숙종은 평생을 산증으로 고생해야 했는데, 산증이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화병과 비슷하여 아랫배에 병이 생겨 대소변을 잘 볼 수 없으며 배가 아픈증상을 뜻합니다.
게다가 상당히 냉정한 임금이기도 했는데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왕비를 이용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으며 송시열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인현왕후를 폐서인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았으며 이후 장희빈의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다시 폐하여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삼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현왕후는 폐서인 되었을 당시 얻은 병이 악화되어 복위된지 7년만에 사망했으며 이에 숙종은 장희빈의 저주를 근거로 끝내 사사하게 됩니다.
환국정치
게다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본인의 아내들도 이용하는 만큼 신하들을 갈아치우는 환국정치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했는데, 현종까지 이어지던 붕당간의 균형이 숙종이 즉위하고 난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었다가 다시 환국이 일어나고 다른 당파가 권력을 잡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설명해서 숙종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들이 숙청당했으며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들이 숙청당했고, 자연스럽게 환국이 일어날 때 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정치가 숙종이 살아있고 정정하다는 조건 하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숙종 말기에 세자였던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두고 자칫 연산군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될까봐 노론들과 함께 폐세자하려하던 와중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에 다루겠지만 이 사건이후로 노론은 경종을 진정한 군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에 소론은 이러한 노론대신들의 심증을 적절히 이용하여 신임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완전히 갈아엎어버리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현종이 시행하던 대동법을 계승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시행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으며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화폐를 주조해서 유통하기 시작했습니다.
화폐 발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평통보가 바로 숙종의 즉위 초반부터 주조되어 전국에 있는 중앙 관청 및 지방 관청에 유통되었습니다. 이러한 화폐를 발간한 이유는 바로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실제로 이것이 잘 맞아떨어져서 조선말까지 화폐를 주조해서 얻은 이익으로 국가의 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하게 됩니다.
또한 왜나라와의 은 무역을 크게 번영시켰으며 조선 후기에 볼 수 있는 대다수의 화폐 경제의 발전은 거의 대부분이 숙종이 시작한 것으로 상평통보를 통해 벌어들인 이익으로 당시 조정의 재정은 상당히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신하들에게는 최악의 임금이었을지 모르겠으나 백성들에게는 꽤나 어진 임금이었는데, 민생을 챙기기 위한 다양한 정책 중 대동법의 확대와 을해정식으로 궁방전을 억제한 것들을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임금으로 추존되지 못한 정종과 단종을 왕으로 복권시킨 것도 숙종의 업적입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보필하던 신하들의 강압적인 요청에 의한 것으로 단종이 복권된다고 해서 세조에 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이는 당시의 인식을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세조 이후의 모든 임금들은 세조의 직계후손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단종을 복권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원 복원
이외에도 태종의 형이었던 이방간의 자손들이 모두 왕족으로 복귀되었으며 이방번과 이방석 모두 복권되어 무안대군, 의안대군으로 불렸으며 소현세자의 아내였던 민회빈 강씨도 복권이 되었습니다.
숙종이 이러한 역사정리 작업을 한 이유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신하들에 대한 충성 요구, 그리고 왕가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위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개편하는데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제도가 확립된 시기가 바로 숙종의 재위기간으로 북한산성을 축조한 시기도 이때입니다.
또한 이때 만들어진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체계는 영조대에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장용영이 생기는등 약간의 변화가 있긴 했으나 고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시설만 손실되었을 뿐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숙종 말기에 건강이 악화되어 오늘내일하는 와중에도 세자를 폐하고 연잉군을 새로 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노론과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당시 노론과 소론은 항상 세자를 두고 옥신각신했으나 숙종이 승하할 때 까지 세자가 바뀌는 일은 없었습니다.
정유독대
그러나 문제는 숙종이 승하하기전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하면서 발생하는데, 사관도 없이 신하가 임금과 독대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법으로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도 아니고 임금이 승하하기 직전에 독대를 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여파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관이 없어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이명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후 노론들의 움직임을 봤을 때 후사가 없는 세자가 즉위하는 것은 막을 수 없으나 즉위하고 난 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것을 권하라는 내용의 명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 됩니다. 아무튼 이 이후 경종이 즉위하고 노론들이 대거 숙청되는 신임옥사가 벌어지게 되었으니 숙종이 원하던 그림이 이런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