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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숙빈 최씨사시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영조는 당시 희빈 장씨의 아들이었던 경종이 세자로 있었으므로 출생 후 연잉군으로 책봉됩니다.

특히 영조는 왕세자의 신분이 아닌 왕세제의 신분으로써 즉위한 조선의 첫번째 임금으로 경종과는 이복형제지간입니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했을 당시 후사가 없던 경종의 왕세제로 책봉되었으므로 직계혈통이 아닌 방계혈통으로 볼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재위기간동안 정통성에 약점을 잡히기도 했었습니다.

구사일생

경종의 재위시절 신임옥사가 벌어졌을 때 노론대신들과 함께 숙청되었어야 마땅하나 형인 경종이 끝까지 연잉군만은 지켜내면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고, 결국 건강상의 문제가 있던 경종이 4년만에 승하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21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당시의 나이는 31세로 꽤 늦은 나이에 즉위했으나 총 52년간 재위를 했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긴시간동안 집권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긴 시간동안 많은 업적을 남긴 이력이 있으나 그에 반해 실수도 상당히 많은 임금입니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숙빈 최씨에게서 출생한 뒤 연잉군으로 책봉되어 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석한 두뇌와 총명함으로 숙종의 이쁨을 많이 받았습니다.

게다가 숙종 말기에는 세자였던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을 보일정도로 총애를 받았는데, 이후 왕세제 시절 삼수의 옥 사건이 발생하면서 노론대신들이 숙청당하고 본인마저 목숨이 위태로운지경이었으나 경종이 보호하여 보위를 정상적으로 잇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왕세제 출신 임금

이런 일들을 겪은 후 왕위에 오른 영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소론 대신으로 삼수의 옥을 고변한 목효롱을 제일 먼저 숙청하고 이후 본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노론대신들의 신원을 복원하고 소론의 권력들을 다시 노론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노론은 다시 집권을 했으나 사실상 영조의 필요에 의해 세워진 자들로 이미 노론대신들의 속셈을 알고 있었던 영조의 입장에서는 탕평책이라는 이름아래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애초에 모순이었던 것이 아버지인 숙종과 비슷하게 자신의 왕권을 위해서 환국을 한 전력이 있으며 모든 당파에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은 시간이 갈수록 노론들의 차지가 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 역사상 태조, 연산군과 함께 사초를 폐기한 임금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때 삭제한 사초는 바로 사도세자가 사망하게 되는 임오화변의 기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영조는 풍산 흥씨 같은 한낱 지역 유지에 지나지 않는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의 영수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는데, 문제는 영조 이후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씨앗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는 외척도 박대하면서 만들어낸 왕권이 자신의 대와 정조의 대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훝날 신하들이 큰 권력을 쥐게 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정조가 재위하던 시절에 이미 홍국영이라는 자가 세도정치를 선보이는등 본격적인 서막을 올리게 됩니다. 다음으로 영조의 가장 큰 실책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임오화변인데,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비극적인 임오화변

이 사건이 발생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정통성에 약점이 있던 본인의 결함을 아들이 풀어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후 유아기부터 혹독한 제왕학을 공부해야 했으며 이는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혹할 정도로 진행되었던 듯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신용하지 못하는 아들을 상대로 대리청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치를 맡기지만 여전히 아들에 대한 간섭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고, 조금의 실수가 있었거나 신하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날이 있다면 양위소동을 벌여 추운 바닥에서 석고대죄를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느정도였냐면 당시 세자의 스승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까지 영조에게 세자를 너무 핍박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 일로 세자는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이상한 행보를 보이게 되는데 백주대낮에 내시나 궁녀를 살해하는등 망나니짓을 하자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히는 형벌을 받아 사망하게 됩니다.

임오화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정조로 즉위하는 세손에게 영향을 끼쳐 정조의 재위기간 보복정치를 두려워한 신하들의 견제를 받게끔 했으며 정조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심리적 상처를 안겨준 사건입니다.

게다가 영조는 이후로도 사도세자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친국하여 몇개의 당파가 소멸되기도 했습니다.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 영조는 세손을 동궁으로 앉혀 후계자로 키우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 영조는 몇달에 한번씩 영의정을 바꾸는등 치매현상을 더욱 더 자주 보이게 되고 당시 세손의 뒷배경에는 급부상한 가문 풍산 흥씨가 있었습니다.

정조로 이어지는 왕위

어쨋든 말기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으나 대신들이 반대하는등 우여곡절이 많았고, 이를 반대했던 홍인한을 탄핵하면서 세손이 임명권은 물론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발병부까지 넘겨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 세손이 무리없이 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대리청정을 맡긴지 3달만에 영조가 승하하게 되는데 이때도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을 방해하려 했던 홍인한과 정후겸은 모두 숙청되었으며 김관주는 순조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우의정에 올라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했으나 실패하여 유배가서 사망하게 됩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일 수 있으나 이 모든 것이 다음 문서에서 서술할 정조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특히 홍본한은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떠오른 홍국영의 덕에 살아남았으며 잠깐 세도정치를 보여준 홍씨 가문도 정조에게 숙청당하고, 이후 정조가 어린 아들이었던 순조를 보필하기 위해 안동 김씨를 끌어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영조는 재위 기간 초반부에 수많은 업적을 세웠고, 이 중에서는 높이 살만한 것들이 많이 있으나 재위기간 후반부에는 이렇다할 업적은 없으며 되레 세도정치가 발현될 수 있는 씨앗만을 남긴 것이 단점입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임금으로 평가받지 못했으므로 묘호로 영종을 받았으나 이후 고종 때 영조로 고쳐져 있으며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삶을 살아온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위기간 내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말기에는 치매였다는 설도 있고, 그에 맞게 상당히 긴 기간동안 재위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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