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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 화려한 그의 업적

quickforinformation 2023. 4. 7. 08:06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이미 출생하기 전에 장남인 의소세손이 요절하여 실질적으로는 장남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영조가 재위한지 35년이 되었을 즈음 출생 직후 곧바로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인해 사망하자 영조의 맏아들이었으나 요절한 효장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하여 왕위를 이었습니다.

특히 영조 말기에는 대리청정을 통해 이미 조정의 대신들과 국정을 논하였으며 이후 25세가 되던 해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됩니다.

조선 역사상 마지막 부흥기를 시작했던 영조의 의지를 그대로 계승하여 잘 수행해낸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조가 남긴 세도정치의 씨앗이 정조가 재위하던 시절부터 싹을 트기 시작해 정조가 승하하고 난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그 서막을 알리게 됩니다.

시작된 세도정치

조선이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세도정치는 정조의 재위시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해당 문서를 통해 세도정치가 어떤식으로 발전했는지 보시면 되겠습니다.

할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인해 결국 사망하는 것을 본 정조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뒤주에 갇히는 형벌을 받을 때에도 정조만이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했으며 특히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보살핌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세손 시절에는 영조의 기대애 부응하며 상당히 총애를 받았던 정조입니다. 아무래도 영조는 본인의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너무 기대가 컷던 것을 직감했는지 정조에게만큼은 유화적으로 대했다는 분석도 할 수 있습니다.

정조가 겪은 임오화변은?

그러나 사도세자가 살아 있을 때에도 영조의 편애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데, 세자는 찾지 않아도 세손은 찾아서 글을 쓰거나 독서를 하는등 총애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일들이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으로 발전했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어쨋거나 정조는 즉위할 당시부터 본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는등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즉위 이후의 모습을 보면 병적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범적이며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이는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겠지만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세자의 신분으로 사망한 이상 정상적으로 보위를 잇기 위해서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영조 또한 사도세자는 죄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정조가 정상적으로 즉위할 수 없음을 알고 어린 시절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지키게 됩니다.

영조가 52년간의 재위기간을 끝내고 승하하자 정조가 즉위하는데, 이때 한말이 본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으며, 그 뒤에 바로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과 정후겸에 대한 숙청을 진행하게 됩니다.

정조는 총 25년동안 치세기간을 가졌는데, 그 기간동안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끈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업적이 여럿있습니다.

첫번째로 칭송받는 것은 바로 준론탕평으로 영조가 사용했던 탕평책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조금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조정은 혼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탕평완론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척신들에 의해 조정이 장악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정조는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준엄한 의리를 중시하는 준론탕평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등용하고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파국으로 치닫던 정국을 어느정도 궤도에 올려놓는데 성공합니다. 이 탕평론은 영조가 사용했던 탕평책 보다는 조금 더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수의 암살 시도를 겪은 임금이 정조인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본인을 호위할 군사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화성을 건설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당시 군영의 모습은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으로 임금보다는 당파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결국 홍복영의 역모를 계기로 장용영을 설치하게 되어 임금만의 호위무사를 가지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팔전 중 하나인 숭렬전을 설치하는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조선이 정식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상업적으로는 신해통공을 시행하게 됩니다.

빛나는 업적들

조선 후기의 상업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면서 독점적 상권을 인정해주는 금난전권을 부여해주는 상황까지 가게됩니다. 이 금난전권은 상업을 폐쇄적으로 변질시켰고 물가의 상승을 초래해 영세한 상인과 수공업자들에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조는 신해통공을 시행하는데,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특히 중요한 부분이 바로 문체반정인데 이는 북학이나 청나라의 문물, 새로운 문체에 관심을 보이던 선비들을 탄압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정조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문체반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는데, 당시 신해통공을 시행하면서 상당한 정치력을 소비했기 때문에 성리학적 관점에서 괴리감이 생기는 청나라의 문체를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문체반정 외에도 서체반정을 통해 서체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는데, 당시 조선은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가 대세였으나 정조는 꾸밈없이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이고 서체반정을 시행하게 됩니다.

이후 이런 영향을 받은 추사체가 탄생했으며 굵고 소박한 서체가 주류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업적이 어느정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바로 임금이었던 정조의 능력에 비해 신하들의 능력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정조의 개혁안들은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임금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보일만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인재 등용제도만 하더라도 1차 필기시험, 2차 필기시험을 거쳐 그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골라서 면접을 보는 과정까지 거쳤으며 여기에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이 등용제도를 통해 발굴해낸 대표적인 인재가 바로 정약용입니다. 결론적으로 정조가 치세했던 기간 그의 정책들에 대한 한계는 바로 본인 정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질과 실천력을 모두 갖췄으나 스스로 가진 능력이 모두에게도 있는 것인줄 착각한 정조는 본인만 운영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정조의 치세 말년에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믿었던 신하들마저 차례로 죽자 완전히 극단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조선 역대 임금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조만이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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