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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현목유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는 아버지인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11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됩니다. 당시로써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 가장 어린나이에 보위에 오른 것으로 이후 헌종대에서 이 기록은 깨지게 됩니다.
세자로 보낸 기간 또한 상당히 짧은데 정조가 건강할 때는 세자가 아니었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갑자기 이루어져 세자로 책봉된지 약 4달만에 정조가 승하하고 임금으로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세종으로 4달동안 세자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나이탓에 친정을 곧바로 하지 못했으며 당시 영조의 계비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이 수렴청정이 상당히 큰 문제를 많이 만들게 됩니다.
사실 정순왕후 자체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의 뒷배로써 역할을 하고 있었고 신유박해로 천주교를 박해하고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까지 천주교를 엮어서 역모로 몰아 숙청한 사람입니다.
당시 이미 몰락해 명맥만 간신히 이어지던 남인들은 완전히 멸망수준으로 치달았고, 남아있던 시파도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어서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가 망해가던 조선을 지탱하기 위해서 인륜을 모르는 천주교 신자들을 개종하게 하고,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처벌을 하라는 교지를 내리게 됩니다.
수렴청정의 폐해
즉, 오가작통법에 관련해서도 질서를 잡기 위한 명목으로 시행을 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유화책을 펼쳤는데 수만에 이르는 공노비를 해방하고 서얼허통을 시행해 기존에 조선이 가지고 있던 신분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론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가 이 모든 인물들을 밀어내고 본격적인 장기집권의 서막을 여는데,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의 시작입니다.
이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은 멸망의 길로 가속화되었으며 순조의 치세기간동안에도 지속적인 난세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순조는 상당히 운이 나쁜 임금이기도 했는데, 재위 기간동안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1832년에는 영국의 암허스트호가 조선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는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순조대에 많이 일어난 우여곡절
물론 이양선이 온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교역을 요청한 것은 처음으로 당시 소통은 암허스트호에 있던 한명이 한자를 잘 알아서 통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정통성에 문제가 없었기에 왕권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정치력 또한 괜찮은 수준이었으나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정순왕후가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수렴청정이 종료되고 나서도 홍경래의 난을 겪으면서 충격을 받아 상당히 무기력한 치세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서 홍경래의 난을 진압했으나 김재찬, 남공철등이 소속되어 있는 비변사에 국정을 맡기게 되면서 세도 가문들이 완전히 국정을 장악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당시 김조순이 살아있을 때에는 안동 김씨의 세력에 있는 대신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국정을 운영했으나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아예 모든 것을 안동 김씨가 마음대로 다 해버리는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순조가 선대 임금들과 달리 신하들을 단속하는데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숙종과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서 지속적인 관리를 한 결과 조정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으나 문제는 숙종부터 정조까지 이어지는 왕권강화와 일당전제화로 인해서 당파 정치가 붕괴되는데, 이는 곧 왕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동시에 임금이 나태할 경우 곧바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당시 영조와 정조는 이런 문제점을 미리 파악하고 스스로 신경을 상당히 많이 써서 문제가 없었으나 순조는 신하들을 관리하는 것에 느슨해지자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한들이 모조리 세도가문들이 차지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 된 것입니다.
순조는 본인보다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양위선언을 자주 하기도 했습니다.일반적으로 조선은 유교국가였으므로 양위 선언 혹은 대리청정에 대한 말이 나오면 이에 대한 교지를 거두어 달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순조만큼은 신하들도 정치에 큰 뜻이 없음을 알았는지 적극찬성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선대 임금인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대신들이 숙청되는 것을 본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병환으로 인해 갑자기 요절했고 순조의 두 딸도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충격을 받은 순조는 기존에 있던 다리의 종기가 재발하여 얼마 뒤 사망하게 됩니다.
순조도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으므로 정약용을 불러 치료하려했으나 당도하기 전에 사망했고, 이전에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에도 정약용이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한 이력이 있습니다.
어쨋든 순조 말년에는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됩니다. 이 때 숙청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으로 하옥되었으나 이후 순조가 왕권으로 김노경을 비롯해 안동 김씨 반대파들을 대거 석방해주기도 했습니다.
세도가문의 급성장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순조도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김흥근이 군국의 사무를 맡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국정을 위해서 만기요람 연감을 편찬하는등의 업적도 남겼습니다. 즉, 정조에게 물려받은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가문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의지가 없어서 안동 김씨가 지속적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정조의 아들이란 사실 외에는 존재감이 상당히 미약했으나 연구가 거듭될수록 조선의 멸망을 촉진한 암군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순조는 세도정치를 타도했다면 망해가던 조선을 살릴 기회를 가지고 있던 상당히 중요한 기로에 서있던 임금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입니다. 또한 효명세자가 단명하고 어린 세손인 헌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역시 단명하는 바람에 완전히 방계혈통인 철종이 즉위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순조시대에는 세도가문을 대체할만한 뚜렷한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변명할 수 있는데 당시 노론은 이전에 일어났던 삼수의 옥으로 세가 완전히 꺽여있었고 소론은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벽파와 남인이 다투면서 서로 세력이 감소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 틈을 타 시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붕당정치를 없애고 세도정치로 이어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도 순조는 스스로 가진 재능만 십분 활용했다면 망해가던 조선을 살릴 수 있었음에도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했으므로 암군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