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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이환 조선의 쇠락

quickforinformation 2023. 4. 11. 08:30

순조의 손자이면서 효명세자의 외아들 헌종은 효명세자가 갑자기 요절하고 할아버지인 순조마저 이른나이에 건강 악화로 세상을 등지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세의 나이에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이는 조선역사상 최연소 즉위 사례로 흔히 알려진 어린임금 단종보다도 이른나이에 임금이 된 케이스입니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즉위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역사상 두번째로 조부에서 손자로 옥좌가 이어지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헌종 즉위 초반에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간의 세력 다툼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각종 야사에 따르면 헌종읜 태어나기 전 태몽부터 상당히 비범했다고 합니다.

또한 출생을 하던 날 학이 떼를 지어 날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일전에 기립을 하는등 상당히 뛰어난 임금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특히 유아기때 천자문 중 백자정도의 뜻을 외웠다고하며 이를 효명세자가 직접 검증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효명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즉시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니 헌종은 태생부터 정통성이 매우 확고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22살이었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불과 4살의 나이에 동궁으로 거처를 옮기게되는데, 이후 조부인 순조마저 44살의 나이로 승하하면서 8살이었던 헌종이 옥좌를 이어받게 됩니다.

친정을 하기에는 상당히 어린나이였으므로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며 할머니는 안동김씨, 어머니는 풍양 조씨집안 출신입니다.

이정도만 보더라도 헌종의 시대는 세도정치가 본격적인 막을 올리던 시기였는데, 첫 왕비는 안동 김씨 중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 김씨였으며 두번째 왕비는 효정왕후 홍씨입니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에 척사윤음이 반포되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특히 기해박해땐 프랑스인 천주교 주교 및 신부등이 순교했으며 병오박해때는 카톨릭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를 하는등 여러사건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게다가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의 문란이 더욱 더 심해지고 있었고, 이에따라 백성들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종은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못했고, 국외적으로는 서양의 선박들이 통상을 요구하는등 민심이 더욱 더 동요하게 됩니다.

게다가 너무 어린나이에 즉위한 탓에 정통성은 확고했으나 왕권이 매우 미약했는데 즉위 2년만에 민진용과 이원덕이 사도세자의 서출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일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정치적 기반이 없는 몰락한 양반들이 주도한 것으로 그만큼 왕권은 물론 왕실의 권위자체가 상당히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부분입니다.

헌종이 친정을 시작하기까지 안동 김씨는 세력을 지속적으로 불려나가고 있었으며 친정을 시작한 후 헌종은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인 힘흥근을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는등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5군영의 훈련대장을 병조판서로 임명하는등 군권을 장악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세도정치의 씨앗인 안동 김씨를 헌종이 지속적으로 견제하며 세력을 약화시키던 도중 23세의 나이로 불과 친정을 시작한지 3년만에 갑자기사망하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헌종은 피를 토하거나 소화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다고 하며, 설사가 심해지고 얼굴에 부종이 나타나는등 건강이 좋았다가 악화되었다가 하는 반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죽기전 다급하게 의원을 불렀으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이때 헌종도 후사가 없었습니다. 살아생전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승하했기 때문에 정조의 마지막 직계후손이며 딸이 하나 있었으나 그 마저 요절을 하게 됩니다.

헌종의 사망으로 인해 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짐과 동시에 효종때부터 이어지던 직계 왕의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이 일로 인해 25대 임금으로 즉위하는 철종을 안동 김씨가 강화도에서 옹립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문서인 25대 임금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담으로 헌종은 효현왕후가 사망하고 난 뒤 계비를 간택할 때 효정왕후 홍씨가 아닌 김재청의 딸 경빈 김씨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순원왕후와 신정왕후 조씨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헌종대에 지어지는 낙선재가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평가되는 헌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보다 더 강인했던 임금인데,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20살에 친정을 하고나서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가문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했으며 특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5군영의 수령을 병조판서로 임명하는등의 업적이 있습니다.

또한 삼정의 문란을 견제하여 백성들의 민생을 살피고자 했으나 너무 어린나이에 사망하게 되어 망국으로 치닫던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었던 것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당연히 안동 김씨 가문에서 전해지는 기록에는 헌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거의 없으며 특히 순원왕후는 헌종을 남의 말을 잘 믿지 않으며 의심이 많고 시기가 많다는 평가를 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어필 봉서를 보면 헌종과 순원왕후가 상당히 갈등이 컷었던 것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으며 헌종의 죽음으로 인해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한 것은 안동 김씨의 복이라는 언급도 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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