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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이원범 나무꾼, 강화도령

quickforinformation 2023. 4. 12. 08:18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지내던 일화로 유명한 25대 임금 철종은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인물입니다. 즉, 조선 왕조의 혈통이기는 하나 촌수가 상당히 멀어지면서 사실상의 평민과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하던 사람으로 헌종 이후 왕조의 직계혈통이 끊어지게 되고 종친들 중에서는 족보 서열이 임금보다 아래인 인물이 별로 없었으므로 즉위할 수 있었던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옹립된 임금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제왕학을 수업받은적도 없고 평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므로 즉위 이후 백성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등 민생을 챙기기 위해 힘썻으나 부족한 정통성과 타의에 의해 옹립되면서 왕권이 약해 제대로 된 정치를해보지도 못하고 32세의 나이고 승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 왕조 역사상 마지막으로 종신 집권을 한 임금이기도 한데 이후 즉위하게 되는 고종이나 순종은 타압에 의해 양위 또는 폐위되므로 철종이 마지막입니다.

임금이 되기 전 이원범이란 이름으로 생활했는데 그는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혈통상 사도세자의 서출 직계 후손입니다. 그 중에서 한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조부이며 은언군의 6남이 바로 이원범의 아버지인 이광입니다.

이전에 정조의 재위시절 할아버지인 은언군이 역모로 몰리게 되어 아버지인 이광을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교동도로 유배를 떠났고 은언군은 순조때 사사되었으며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40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태어나는 인물이 바로 이원범으로 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숙종부터 후궁 서출이었던 영조(연잉군),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 역시 후궁 서출, 숙빈 임씨의 아들 은언군과 그의 첩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정도면 방계혈통중에서도 최상위급으로 왕족으로 분류하기에도 상당히 애매한 부분입니다. 게다가 철종은 아버지대부터 군호조차 받지 못하는 허울뿐인 왕족이었고 옹립되어 즉위하기전날 덕완군이라는 군호를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즉위 이후 아버지나 큰형에 군호도 올렸으며 방계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광의 유배형이 업성지고 난 후 태어나 한성부에서 꽤 괜찮은 삶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해 민진용이 큰형 이명을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명은 처형되었으며 이원범은 연좌제를 적용받아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도로 유배가 되었습니다.

철종의 즉위과정

이후 그 곳에서 나무꾼을 하다가 옹립되어 임금으로 즉위하는 것입니다. 철종은 즉위하는 그 순간까지 상당히 기구한 삶을 살았는데 먼저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당시 순원왕후가 이원범을 차기 임금으로 지목하게 됩니다.

이때 본인을 모시기 위한 행렬이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나 형이 역모에 몰려 숙청당한 전례를 기억하고 산속으로 도망쳤다는 일화는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후 영의정과 주변 백성들의 설득으로 가마에 올라 경복궁으로 향했으며 이후 즉위하고 나서는 본인이 거주했던 집을 용흥궁으로 격상시키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안동 김씨가 철종을 옹립한 이유는 정치적인 목적만을 이유로 알고 계신분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당장 철종이 헌종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기 때문으로 실록이 아닌 야사에서 전해지는 가장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던 이하전이나 이하응은 실제로 철종보다 더 촌수가 멀었습니다.

이하전은 덕흥대원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이하응은 아버지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한 것이므로 실제 혈통상 철종이 가장 가까운 왕족이었습니다.

어쨋든 철종은 즉위 시점에 이미 성년에 가까운 19세의 나이였으며 재위기간중에도 제법 임금의 모습을 갖춘상태였으므로 즉위한지 3년만에 친정에 나서게 됩니다.

위에서도 언급을 했다시피 백성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왕족이었으므로 백성들을 위한 여러가지 개혁정책들을 추진했으나 번번히 세도가문들에 가로막혀 좌절하게 됩니다.

이는 정통성의 부재로 인한 왕권 약화, 제왕학의 수업 부재로 인해 정치력이 낮았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궁내에 정치적인 기반이 전무했으므로 국정을 장악하는데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결국 세도가문의 전횡에 의해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진주와 함흥, 전주에서 조선 역사상 최대의 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임술민란으로 당시 조정 대신들은 이 민란을 수습할 의지가 없었고, 철종 혼자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이때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이를 시행하고자 했으나 안동 김씨와 그 일파들이 반대하게 됩니다. 지속적인 개혁 시도에도 반대에 부딪히자 결국 이에 질려버린 철종은 승하하기 전까지 술과 여색으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안동 김씨들의 목적에 의해 옹립된 왕이라 실권은 없고 그저 이름만 있는 자리에 허탈함을 느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철종이 이른나이에 갑자기 승하하게 되자 안동 김씨는 새로운 후계자를 찾기 위해 임금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철종은 5남 6녀를 두었지만 모두 이른나이에 요절했고 후궁이었던 숙의 범씨 사이에 영혜옹주만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저도 14살의 나이에 승하하게 되면서 철종 역시 헌종과 마찬가지로 후사가 없는 상태로 승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즉위하게 되는 고종은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차기 임금으로 지명되는데, 바로 흥선대원군의 차남 이명복입니다. 그러나 철종과 고종은 사실상 남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인조대에 가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데, 촌수로는 무려 17촌에 달합니다.

어쨋거나 이런저런 개혁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지지기반이 전무하여 이루지 못한 것이 결국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이 극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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