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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이재황 그의 실패한 개혁들

quickforinformation 2023. 4. 13. 08:24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당시 조선의 상황이 제국주의, 식민지 개척, 침략전쟁등 강대국들의 광풍이 불던 조선 말기에 임금으로 즉위해서 부국강병과 국체 보존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과업을 맡았으나 어느것도 성공하지 못해 망국의 임금이 된 인물입니다.

물론 두가지의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면 역사에 길이남을 명군으로 이름을 남겼겠지만 고종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고, 실제로 조선이란 나라의 상황도 그럴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실제로 고종은 급변하고 있는 세계의 정세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를 따라갈만큼의 능력은 되지 못했고 때로는 무모함이 필요한 정치판에서 본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못했던 조선에 더 큰 시련을 발생하게 만든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고종에게 필요한 능력

특히 당시 상황은 과업을 이루기 위해 필요했던 능력들을 고려해본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를 맡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애초에 그럴만한 시도조차 못한 것이 가장 큰 단점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후사가 없었던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실제로 철종과 고종의 관계는 9촌 지간이었으며 양자 입적을 제외한 실제 혈통으로 봤을땐 17촌지간입니다.

사실상 남이나 다를바가 없는데 철종이 그랬듯이 고종도 완전히 방계 중의 방계 왕족이었습니다. 철종의 승하로 인해 효종의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당시 왕족의 상황은 임금의 다음 대에서 즉위해야하는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후손 중에서 즉위할 인물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종은 인조의 3남이었던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무려 9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임금이 있으며 왕가였던 전주 이씨 중에서도 왕권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완전히 방계혈통이었습니다.

그는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 민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당시 흥선군은 실권은 없으나 조정에서 주요 직책들을 맡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방계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양반 계층에 속하는 상류층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즉위 이후 15세가 되던 시점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며 당시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살아있었으므로 상왕의 칭호는 받지 못했으나 지속적으로 섭정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고종의 친정은 15세부터 시작이기는 하지만 실제 정치를 한 것은 더 뒤로 미뤄지게 됩니다. 22세가 되었을 때 최익현의 탄핵을 계끼로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던 신하들을 몰아내고 친정을 시작했는데 이후로도 흥선대원군은 지속적으로 고종의 정치에 간섭을 하기도 했습니다.

친정을 시작하고 초기에는 박규수를 비롯한 흥선대원군 지지세력과 중도였던 안동 김씨, 김병학을 비롯한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균형을 맞추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흥 민씨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내쳤음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이 시행했던 개혁안들을 대거 수용했는데 호포제나 사창제, 서원 철폐등을 지속적으로 고수했으며 당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호전을 혁파하고 문세를 없애서 민생을 챙겼습니다.

이러한 행보를 봤을 때 고종에게는 어느정도 능력은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은 이정도의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천재수준의 임금이 필요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또한 당시 조정의 재정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 청전을 폐지했으나 조정의 창고에는 청전만 가득했고, 당시 실질적인 화폐역할을 했던 상평통보는 지방의 관아에서 모두 챙기고 청전만 공납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청전을 폐지하는 순간 조선의 재정상황은 그야말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이후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사활을 걸게 됩니다.

또한 고종은 재위기간 중 상당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조선 내부에서 일어난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리는 순간 이미 조선의 명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청나라의 개입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아관파천을 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다시 승리하면서 완전히 일본의 속국이 되버립니다.

멸망이 가까워진 조선

을사조약을 통해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되는데, 당시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알현 때 을사조약 체결을 거부했으나 어전회의에서는 어차피 체결하게 될 거 그냥 해주자는 식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당시 어차피 일본에 합병될 처지인데 기왕이면 대한제국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바라는 것이 낫다고 말한이가 바로 유명한 매국노 이완용입니다.

그때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때 거의 나라를 갖다 바치는 수준으로 체결한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후 이토히로부미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뒤에서 조종해서 고종의 퇴위 압력을 넣고 있었으며 이에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하여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박영효도 이 일을 무마하는데 실패했고, 고종은 사실상 궁에 감금이 되어버립니다. 이때 이완용이 내시 두명을 데리고와서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운 뒤 황위를 순종으로 양위하게 되어 고종은 강제로 퇴위가 되었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즉위를 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군대는 강제로 해산되었고, 정미의병이 거병했지만 숭례문에서 병력의 차이로 인해 패배하고 맙니다. 이 다음 사법권과 경찰권도 일본에 넘어갔고,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500년 역사의 조선이 멸망하게 됩니다.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에도 잔존해있던 유림들은 고종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 아닌 이태왕의 작위를 받은 고종에게 절을 할 수 없다며 예송논쟁과 비슷한 언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에게는 왕의 예우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준 내용이지만 독살 의혹이 있던 고종의 소식을 듣고 예를 갖추기로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조선 역대 임금들 중에서 평균정도의 능력은 있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임금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부분입니다.

게다가 고종의 재위시절에는 전세계적으로 식민지전쟁이 활발하고 국체보존이라는 업적을 가진 임금이 몇 안되는 것을 본다면 고종 자체에 대한 비판도 일제가 실제 그 이상으로 폄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고종에 대한 바른 인식과 평가를 내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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