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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중전 민씨의 왕자 중 유일하게 장성한 인물로 태어나자마자 금지옥엽으로 자랐으나 건강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던 순종입니다.
특히 아들인 순종의 건강을 염려한 고종과 중전 민씨가 무속인을 부르는등 국가재정을 이용해서 아들의 건강을 염원하면서 예산을 많이 낭비한 일화는 상당히 유명합니다.
게다가 순종이 태어난 3월 25일은 건원절이라는 국가의 경축일로 지정할 정도였으며 이후 벌어지는 독살미수사건으로 인해 안좋았던 건강이 더욱 더 악화되는 사건도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러시아어를 번역하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커피에 아편을 넣었는데, 공교롭게도 고종과 순종이 함께 커피를 마시던 상태였고 평소에 커피를 즐기던 고종은 커피의 맛이 이상함을 깨닫고 바로 뱉어내서 큰 화를 면했으나 평소 커피에 대한 지식이 없던 순종은 다량을 섭취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순종은 피를 토하고 며칠동안 혈변을 보는등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이후 치아가 상당수 빠져버려 젊은 나이임에도 틀니는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일본 몰래 파견한 것이 들통나서 퇴위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인 고종이 순종에게 섭정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이용해서 순종을 강제로 옹립하게 됩니다.
강제 옹립
그러나 역사적으로 봐도 타인에 의해 옹립된 왕은 왕권이 매우 약했는데, 이때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를 했으니 실제 모든 실권은 매국노였던 이완용과 송병준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종의 즉위 이후 대권을 잡고 전면에 나선 이완용과 송병준은 조선의 국권을 착실하게 일본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순종이 즉위할 당시 일제의 강압으로 강제로 퇴위된 고종과 순종이 불참한 즉위식에서 일본이 대역을 세우고 서둘러 양위식을 거행하는등의 소동도 있었습니다.
이 일을 거행한 일본측은 본국으로 대리청정을 양위식이라고 외교 전보를 보냈으며 이는 일본 내에서도 상당히 큰 의문을 가진 처사였습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를 보필하던 내명부조차 대리청정은 양위가 아니라는 식의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당연히 민심은 흉흉할 수 밖에 없었고, 백성들은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 불을지르는등 항의를 했고 친일 대신들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정도로 백성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은 순종을 정식 황제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황태자비 윤씨도 황후로 진봉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호는 고종이 사용하던 광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에 일본과 친일대신들이 연호가 향후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여 새 연호를 사용하게끔 해서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순종은 즉위했던 해에 의친왕이 아닌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당시 신하들이 동생이므로 황태자가 아닌 황태제로 책봉해야한다고 진언했음에도 이전에 정종이 태종을 세자로 책봉한 것을 전례로 들러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이일은 순종의 의견이 아닌 고종의 의견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인데 엄귀비의 견제설 또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즉위 이듬해에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조선의 경제권을 침탈하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벌어지고 실력 양성 운동도 일어났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과 송병준에 의해 그리고 일본의 압력에 의해 국권을 모두 내어주다가 1910년 순종이 천황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형식으로 조선은 한반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순종은 나름대로 이 일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순정효왕후 윤씨만큼이나 반대했는지는 의문이 많은데 한일 합방 조약 각서에는 일본의 덴노와 순종의 서명과 어새가 날인이 된 조칙을 내리기로 했으나 어새만 찍힌 칙유가 내려졌으므로 순종이 서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한일합방은 무효?
게다가 조약서에는 국새를 찍었고 조칙에는 날인이 되어 있지 않으므로 애당초에 효력이 없는 무효였고, 조칙에 옥새가 날인이 되지 않은 것은 순종이 날인을 거부해서 이전 임금이었던 고종의 것을 가지고와서 날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에 와서는 한일 합방 조약 각서가 무효라는 것을 인지하지만 당시에는 그럴만한 명분도 힘도 없었으므로 강제로 합병이 성사되게 됩니다.
이후 순종을 비롯한 왕족일가는 조선령 왕공족으로 불리며 일본의 황족보다는 서열이 낮고 귀족보다는 높은 이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임금이었으나 무언가를 해결하려 했던 의지나 행동조차도 없었으며 친일 대신들과 일본에 압력에 무력하게 굴복하다가 일본에 합병된 이후에는 이왕직에 만족하며 살다가 사망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이미 즉위했을 당시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나라에 망조가 든 상태였으며 즉위했을 당시에도 스스로 즉위한 것이 아닌 일본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고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실제로 순종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순종차원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시도를 하더라도 당시에 할 수 있는 것들은 고종대에서 거의 대부분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자력으로 일본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해외 세력이나 외교적 청원등이 전부인데, 이 모두 고종이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바 있습니다.
게다가 임금이 되었음에도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으므로 실제 국정을 논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아니라 순종의 거처인 창덕궁에도 일본이 파견한 경비들이 삼언한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순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마지막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과 달리 초반에는 고종이 양위가 아닌 대리청정을 지시했기 때문에 임금으로 보면 안된다는 극단적인 시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조선의 마지막 임금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임금의 아들이라는 천운을 타고 났으나 시대를 잘 못 만나는 바람에 스스로 아무것도 해볼 수 없었던 비운의 임금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왕권이 약했던 임금은 많았지만 이토록 무력한 임금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