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실패한 근대화, 갑신정변

quickforinformation 2023. 4. 20. 08:16

1884년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급진 개화파 세력들은 조선을 서구식으로 근대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일본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난을 일으키는데, 당시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속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정강 14조등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출동하여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고 백성들 또한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이에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난이 끝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급진 개화파세력들이 온건 개화파 세력들을 숙청하는데 이때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등의 영선사 출신과 여흥 민씨 중 개화에 적극적으로 알려진 민영목과 민태호등 많은 온건 개화파 세력들이 숙청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후 조선에는 일본으로 망명한 급진 개화파, 숙청당한 온건 개화파 대다수가 사라지면서 추후 근대화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2년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은 당시 외척이었던 여흥 민씨들에게는 위기로 작용하고 개화파에게는 좋은 기회였는데, 이때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 간 사신들은 청나라에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조공국이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 크게 하기 위해 청나라는 군사를 움직이게 됩니다.

당연히 자국의 영토내에서 일어난 난을 수습하지 못하고 외부의 세력에 힘을 빌렸으니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청나라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때 청나라는 조선을 기존의 제후국의 위치가 아닌 근대식 종속국을 만들고자 함을 알 수 있는데,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더욱 더 심화되었고 외교, 군사, 재정등의 고문을 파견하는등 조선을 착실하게 수탈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게다가 영약삼단을 통해 조선의 독자적인 외교를 금지하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의 상인이 조선내에서 무역이 가능하게끔 하는등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이 시기에 갈라지는데, 개화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조했으나 근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서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급진 개화파는 여흥 민씨 외척과 구신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온건 개화파는 이에 반대하고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청과의 사대의 예를 계속해서 갖추길 원했으나 반대로 급진 개화파는 청과의 사대를 끊자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결국 두 개화파는 뜻을 함께 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게되는데, 이때 일본과 접촉한 급진 개화파는 지원을 약속받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우정총국 개국 연회가 열릴즈음 미리 준비한 폭탄 테러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폭탄이 불발이 되자 이웃집에 방화하여 혼란을 일으킵니다. 당연히 연회는 불길로 인해 소란스러워졌다가 민영익이 김옥균의 연회장 출입이 빈번한 것을 의심하고 밖에 나갔으나 이내 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돌아오자 연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급진 개화파는 미리 암살하기로 한 4영사를 단 한명도 암살하지 못했고 민영익 또한 중상을 입히는 선에서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 계획이 틀어지마 김옥균은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의 태도를 다시금 확인하고 고종에게로 달려가 청군과 사대당이 난을 일으켰다는 거짓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때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기존에 암살하기로 했던 온건 개화파를 차례대로 죽이게 됩니다. 이렇게 고종을 속이고 이튿날 급진 개화세력들은 정강 14조를 발표하며 내각을 개편하게 됩니다.

이 개혁안을 발표하기도 전에 눈치빠른 명성황후가 급진 개화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보고 위안스카이에 원병을 요청하고 여러 이유를 들어 다시 고종이 창덕궁으로 회궁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쩔수 없이 창덕궁으로 돌아간 급진 개화세력은 청나라 군사 1,500명이 공격을 하자 이내 일본군이 철수를 하게 됩니다. 셋째날 일본공사관 역시 백성들에게 돌팔매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정오가 되자 공사관에서 불이 나게 됩니다.

계속된 공격으로 인해 일본공사는 인천으로 도망을 가는데, 이때 김옥균과 박영효등 급진 개화세력들도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환복한 다음 일본군과 함께 인천으로 따라갑니다.

인천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군대와 백성의 공격을 계속 받아야 했으며 결국 3일만에 갑신정변은 끝이나고 급진 개화세력은 모두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갑신정변이 결과적으로 이후 근대화에 큰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개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갑신정변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하더라도 반역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며, 따라서 개화는 곧 반역이다 라는 수식어가 생기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한성 내에서는 개화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전까지는 개화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좋지도 싫지도 않아했던 사람들이 갑신정변 이후로는 개화란 외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이해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이 갑신정변을 진압하는데 큰 도움을 준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일본과는 공사관 신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명목으로 한성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정변과정에서 대립했던 청군과 일본군은 톈진 조약을 통해 군대를 철수했으나 이후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데 배경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