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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실질적으로 장남노릇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인물, 바로 조선의 2대 임금으로 즉위한 이방과 정종입니다.
형인 이방우가 있으나 차남임에도 실질적으로 장남노릇을 한 이유는 바로 형은 가문의 거점인 동북면의 가별초와 식솔을 통솔하기 위해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즉, 차남인 이방과가 아버지인 이성계에게 직접 군인수업을 받고 함께 전장을 종횡무진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기록에는 유약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 기록을 본다면 이방과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진정한 무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 시대부터 명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장으 누비고 다녔으며 20세가 되던 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리산에 출정을 가서 승리했으며 황산 대첩때에도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동생인 이방원과도 죽이 잘 맞았는지 정몽주를 암살하는 계획에 이방과가 동조를 해줌으로써 정몽주를 암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형의 동조가 없었다면 이방원 혼자서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100% 성공할 수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과의 생애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후 영안군에 봉해진 이방과는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 절제사게 임명됩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 된 이후 개국공신만큼의 공을 세운 왕자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으며 오히려 정도전이나 남은과 같은 재상들에게 권력이 부여되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세자를 책봉하는데 실수를 하면서 이방원을 필두로하는 제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고, 이 난이 성공한 이후 반강제적으로 이방과가 세자로 책봉이 됩니다. 이는 실질적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방과였기 때문에 형이 있었음에도 장남 우대 원칙에 따라 세자로 책봉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태조가 양위를 하면서 조선의 2대 임금으로 즉위하지만 당연히 모든 권력은 이방원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사냥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임금이 된 후 정종은 잠시 조선의 수도를 개경으로 돌려놓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대한 향수도 있으며,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한양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종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경복궁에서 즉위한 인물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또한 얼마나 운명의 장난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약 2년간의 짧은 재위기간을 마치고 동생인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온천 유람은 물론 제사, 불공등 다양한 유희를 즐기다가 노년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말년에는 동생인 태종도 이러한 형의 생활을 부러워했을 정도라고 합니다.무인정사의 실질적인 배후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알려진 정종은 본인의 서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다 이방원에 의해 취소된 이력도 있으며 그로 인해 동생인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된 기록도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은 절대 야망이 없던 인물이 아니었으며 적장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본인에게도 분명히 명분이 있으니 이방원이 조금이라도 허술했다면 충분히 양위를 하지 않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또한 학자들에 따라서는 무인정사의 실질적인 배후는 태종이 아니라 정종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끌어내린 것이 정종이라면 이런 정종을 끌어내리고 모든 것을 취한 사람이 바로 이방원이라는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분석에는 상당히 힘이 있는 이론인 것이 무인정사를 모두 태종이 주도 했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택현을 명분으로 태종이 즉위했으면 되나 굳이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형인 이방과를 먼저 왕으로 세운 뒤 본인이 택현이라는 명분으로 즉위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각을 조금 다르게 본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종이 실질적인 배후라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정종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주 내용인데,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형제를 살육한 이방원이 왕이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형인 정종을 왕으로 세워 태종의 왕위 계승을 방해한다는 이론입니다. 실제로 이 분석은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왕자의 난이 발생할 당시 아무것도 모른채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는 정종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 반대론이 더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정종은 재위기간동안 제대로 된 군왕의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이 임금이 된 이후 승하하기 까지 계속해서 조선의 임금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묘호를 올리지 않은 것인데 이는 이후 예종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묘호를 더하는 것이 논의 되었으나 예종이 일찍 승하하면서 이 또한 무마되어버렸습니다. 이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묘호가 정종으로 정해졌으며 지금의 우리가 아는 정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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