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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결국 개화파에 의해 조선은 서구화에 한걸음 다가가게됩니다. 이때부터 약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두차례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데 조선은 서구화 및 근대화를 위해 개혁을 진행하고 기존의 정치를 비롯한 경제 부문, 군사 부문, 사회 부문등 대다수 국가 경영에 필요한 부분들에 대한 넓은 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공사였던 오토리 게이스케는 3차례나 내정 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면서 조선이 서구화를 할 것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입니다.
하지만 이때 조선의 상황은 얼마전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을 시기였으며 농민운동이 발발했을 당시 개혁을 요구할 것을 본지라 사실상 개혁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주권을 찬탈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교정청을 설치해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게이스케의 의견을 묵살하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당시 유력 가문이었던 여흥 민씨 가문은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여 민란을 수습하고자 했는데 청나라가 이에 응해 1894년 아산만에 군대를 파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 청나라와 일본은 이전에 맺었던 톈진 조약이 있는데 왜 말도 없이 군대를 파병하냐며 자기네 군사로 똑같이 약 3일이 지난 후 파병을 하게 됩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청나라에만 군대를 요청한 것인데 일본까지 파병을 하자 계획에 없던일이 되고 이에 당황하여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에 군대를 물리쳐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당연히 청나라와 일본은 군대를 물리라는 요청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일본군은 화약을 맺은 다음날 인천으로 군대를 2차로 파병하게 됩니다.
일본은 조선에 지속적으로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최근 몇달동안 수차례 개혁 권고안을 조선에 제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교정청을 설치해서 스스로 개혁을 진행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당연히 거부하는데, 이에 일본군이 1894년 6월 어느날 새벽에 기습하여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수도내에 있던 조선군 병영도 공격해 무기와 탄약을 모두 몰수해버립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원인
이후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여 마치 흥선대원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처럼 포장하는데, 이후 6월 23일 그 유명한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됩니다.
이때 일본은 국제법으로 규정되어 있던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청나라를 기습하여 지탄을 받았으나 어쨋든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므로 조선과 청나라 모두 일본의 마수안에 놓이게 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2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갑오개혁은 먼저 군국기무처의 이름으로 시행된 개혁이 첫번째인데 이때의 개혁안들은 모두 장정존안이라고 명명하여 따로 모아놓기도 했으며,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루고 있던 시기라 나름대로 자주적인 개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개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내각을 1차 김홍집 내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당시 개혁안은 궁내부를 설치하고 의정부의 6조 8아문으로 고치는 관제작업을 시행하게 됩니다.
또한 개국 기년 사용, 연좌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신분제 철폐, 문벌 폐지, 조세 금납제, 도량 통일, 은본위 제도, 과거제도 폐지, 경무청 설치, 군제 개편등이 개혁안이었습니다.
이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동안 청나라의 눈치를 보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약 20개의 조항을 조선에 제시하는데, 이 중 굵직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실각, 왕실의 정치 참여 제한, 조세 탁지 아문, 지방관 권한 축소등이 있습니다.
이전에 수도를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웠던 일본은 그를 실각시키고 갑신정변의 여파로 일본에 망명을 갔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하여 2차 갑오개혁이 단행이 됩니다. 이때를 2차 김홍집과 박영효 내각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2차 갑오개혁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본은 홍범 14조를 발표하는데, 이는 청나라와 유지했던 사대의 관계를 끊어내고 왕실의 규범을 제정, 왕권 제한, 조세 일원화, 왕실의 1년 예산 편성등 내정 간섭을 본격적으로 심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갑오개혁으로 인해 조선은 약 500년동안 이어져오던 대부분의 관습과 제도가 철폐되고 신분제가 사라지게 됩니다. 당연히 급격한 변화는 당시 기득권은 물론 노비계층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혼란이 되었을 것이 자명한데,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노비였던 사람들은 모시던 주인 밑에서 머슴으로 약간의 보수를 받아가며 이전과 똑같은 일을 하는등 순탄하지 않아보이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진행된 갑오개혁은 그 자체로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돋움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개혁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이 있었고 특히 일본의 간섭이 심했던 만큼 일본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진 측면 또한 강하게 보입니다.
게다가 약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급격하게 많은 개혁들을 진행하다보니 당시 시대상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음을 알 수 있고 그에 대한 대비책은 물론 후속대처로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것이 갑오개혁의 한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