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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임금이자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입니다. 위로는 형이 둘이 있었으나 스스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나 조선을 건국한 이후 개국공신들을 포상하는 과정에서 불만이 생겨났고, 이후 태조 이성계의 세자 책봉과정에서 이러한 불만을 터뜨리게 되면서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상당히 드라마같은 인생을 산 인물인데 어려서는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는 정몽주를 척살하는데 앞섰습니다. 고려의 과거 시험은 상당히 어려운 난이도로 유명했는데 여기에 급제를 할 정도면 상당히 비범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태종이 임금이 되고나서도 여러부분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아들인 세종의 외척을 싸그리 말살하여 세종의 치세기간동안 외척의 간섭이 없게끔하고, 왕권에 위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없이 살해하였으나 위해가 되지 않는 다고 판단한 인물의 경우 상당히 너그러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무인정사 제 1차 왕자의 난

태조의 뒤를 이을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이방우와 이방과 두형이 아닌 이복 막내 동생인 이방석이 책봉되자 여기에 큰 불만을 품게됩니다. 결국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때 왕세자 이방석을 비롯해서 이방번, 정도전 일파등을 모두 참살하여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형인 이방과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태조로부터 선위받아 정종으로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탄하게 본인이 왕위를 이을것이라고 보였으나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형인 이방간의 세력을 제거하고 형을 유배보내는 것으로 본인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자신의 이복동생은 무참히 살육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복형인 4남 이방간은 왜 살해하지 않았느냐인데, 이미 조선내에서도 형제간의 골육상잔으로 인해 민심이 피폐해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본인의 동복형까지 처형한다면 더이상 수습이 불가능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정종이 2년간의 치세를 한 후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3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종인 것입니다. 왕이 된 이후 지속적으로 행한 일은 바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왕권에 해가 될만한 인물들을 척살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종의 생애

사실 난으로 왕권을 잡은 인물치고는 상당히 피를 적게 흘린 축에 속하는데 사실 임금으로써의 모습만 본다면 이방원은 왕이 될 그릇을 충분히 타고났다고 보여집니다.

성격이 화통하고 진솔하였으며 왕권에 해가 되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신하들을 포용하는 동시에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임금이었으며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무예에도 어느정도 도가 있으나 고려의 과거에도 급제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야말로 먼치킨 성격을 지닌 임금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비범한 두뇌를 제대로 물려받은 사람이 세종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종은 다음 글에서 다루겠지만 아버지인 태종의 후광에 힘입어 안정된 치세를 펼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는 시각도 다분하게 존재합니다.

즉, 태종은 본인의 대에서만이 아니라 아들의 치세에도 영향을 준 인물이며 승하하면서 양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세종에게 양위하여 세종의 왕권에 도움을 주는등 여러가지 성군의 면모도 충분히 지닌 자질이 충분한 임금입니다.

사실상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정종과 태종의 합작덕분인데, 바로 정몽주를 척살하면서 건국 과정이 급속도로 빨라지게 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기록으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인데 그전까지는 아버지인 이성계가 정몽주를 척살하는 것에 머뭇거리면서 시간을 지체했으나 정몽주가 척살되고 난 이후 아버지의 눈밖에 났지만 실제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는 급물살을 타게됩니다.

이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인 정몽주가 사라지자 이성계를 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신진사대부인 정도전과 조준등이 복귀하면서 공양왕이 퇴위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이 됩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진행되었으나 어쨋든 태종은 각종 매체에서 다루는 것 만큼 폭군은 아니었으며 실제로는 성군의 기질이 더 다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개국공신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즉위하는 과정에서 정도전등을 척살했으나 이는 왕권 강화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개인적인 원한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또한 태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제대로 닦아 다음 대에서도 제대로 된 치세를 펼칠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태종의 업적

조선왕조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 기틀을 마련한 임금이 바로 태종입니다. 먼저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없애서 군권을 모두 재편한 뒤 삼군부에 넘겼으며 이후에는 고려시대의 사병제도가 없게끔해서 본인들이 나라는 건국한 과정 자체가 생기지 않게끔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왕권 강화는 물론이고 조선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큰 국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언론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대간과 사관에 큰 힘을 실어서 관제를 정비하고 재상중심의 정치를 파괴하게 됩니다. 고려시대의 도평의사사가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치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도 바로 태종대의 일이고 실무관청인 육조를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하게 됩니다.

경제방면으로는 화폐개혁을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고 당시 조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화폐개혁은 너무 이른처사였다고 보여집니다. 당시 물물교환이 주롤 이루던 조선에서는 태종 이후로도 상당히 많은 시도끝에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라는 화폐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외에도 외척을 말살하였는데 본인의 처가는 물론이고 아들인 세종의 외척까지 모두 가문을 말살합니다. 이는 추후에 세종대에서 다루겠지만 이일로 인해 세종의 치세에 간섭을 할 인물이 없어 상당히 안정적인 왕권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게다가 본인이 난을 도모하여 성공하는 과정에서 도와준 인물들까지 모두 숙청을 했는데 이숙번과 본인의 처가, 사돈까지 모두다 멸문수준으로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방행정도를 개편하여 팔도로 나누고 부, 목, 군, 현을 두어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했습니다. 가장 태종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태종이 치세를 펼친지 18년이 지난 후 세자였던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로 보통은 건강이 나빠져서 죽기직전에 유언으로 양위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아들의 치세기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스스로 물러나고 양위한 것입니다. 즉, 이는 조선 역사 전체를 보더라도 태종 한명 뿐이며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군권은 세종에게 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태종은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세종의 몸이 비대하다는 이유로 줄곧 불러내서 함께 사냥을 다녔다고 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태종이 장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인데, 이성계의 집안이 대대로 장수하는 인물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단편적으로만 봤을 때 냉혈한으로 보일 수 있는 숙청의 군주 태종이지만 역사를 꼼꼼하게 살펴보거나 조선왕조실록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들은 그가 분명히 명분에 있는 숙청을 했으며 그다지 많은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태종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구가 되면서 바뀌는 부분이 있겠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건 세종대왕의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칭송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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