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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태어나 즉위한 첫번째 임금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당위성과 명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 임금이 4대 세종입니다. 고려시대에 태어나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양위받아 즉위한 임금으로 31년간의 치세기간을 가졌으며 그 기간동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수많은 치적을 남긴 성군이기도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군으로 불렸으며 한반도 전체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세종만큼 성군이었던 임금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이 편찬한 한글은 현재까지도 그 우수성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한반도에서 공용문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세종 시절에 정해진 북쪽의 국경은 현재까지 이르렀으니 조선 초기의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임금입니다.
우리로서는 세종이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되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종종볼 수 있으며 실제로 세종이 치세기간을 약 10년만 더 가져갔더라도 세조같은 패악무도한 인물은 등장할 수 없었으며 단종역시 정상적으로 즉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종의 생애
당시에는 태종이 아닌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다섯명의 형이 있었으나 3명은 어려서 요절했으므로 실질적으로 두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두명의 형은 각각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으로 세종은 충녕대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세종은 왕이 될만한 그릇을 보여줬다고 하는 기록이 곳곳에 있습니다. 특히 역사상 최고의 독서광이라고 불리웠을 정도로 아예 책에 파묻혀 사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 태종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는 충녕대군을 안쓰럽게 여겨 독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때 세종은 임금이 되어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인 미술과 음악, 수석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고 임금이 되어서 이때 공부한 학문을 유감없이 떨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세종은 위로 형이 두명이나 있었으니 애초에 임금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두 형 중 양녕대군은 태종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망나니 짓으로 스스로 임금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있었으며 둘째형인 효령대군은 부처를 받드는 선비로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을 택현할 수 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인 태종은 형제간의 골육상잔을 딛고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계승의 원칙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지키려 했으나 효령대군은 애초에 뜻이 없었고, 양녕대군은 그야말로 망나니 였으니 세종이 임금으로 택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건국초기였기 때문에 장자계승에 따라 즉위한 인물이 없었으므로 누구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대였기도 합니다. 어쨋거나 세종은 세자로 책봉되기 이전부터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알고 행동했다는 의견도 있으니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 책봉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모두들 잘 아시는바와 같이 세자 책봉 2개월 후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를 선언하는데 의례적으로 하는 양위소동이 아닌 진짜 양위를 하게 됩니다. 이는 개국초기 불안정한 왕권을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양위했으니 안정적인 왕권을 도모하기 위해 상왕으로 물러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선위를 반대하던 신하들도 즉위복 차림을 한 세종을 보고는 조복으로 갈아입은 후 즉위식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용포는 군주만 입을 수 있는 것으로 이미 세종이 용포를 걸친 이상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임금으로 즉위 한 세종은 상왕인 태종의 비호아래 본인의 치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세종의 업적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농업과 교육, 음악 및 제례, 언어, 역사, 수학 및 과학, 군사, 영토등 대다수의 정치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종때의 농업 경작면적은 약 150만헥타르로 이 수치를 넘은 것은 1900년대 이르러서야 조금 더 높은 수치가 되었습니다. 즉, 세종 시절의 경작면적은 당대 최고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였으며 농업법이 뒤떨어지는 시기였다고 감안한다면 상당히 큰 수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경작면적의 증가에 따른 생산량 보다는 세종시절에 호적과 세수가 제대로 파악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한 세종은 임금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학문에 몰두를 했는데, 특히 신하와 임금이 토론을 하는 자리인 경연에서는 대놓고 신하를 가르치거나 어려운 질문을 해서 신하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면박을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종 이전과 이후에는 경연이라는 자리는 임금이 모두 좋아하지 않는 자리였음을 생각해본다면 세종의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임금이 이렇게 학문에 열중을 하고 부지런하니 신하들로써는 임금보다 덜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지는 안봐도 뻔한 일입니다. 또한 세종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상당히 깊었던 임금이었는데 노비들에게 출산휴가를 부여하고 노비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일화도 있습니다. 게다가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자주 연회를 베풀었는데 당시 80세라고 함은 현재의 100세 이상에 버금갈 정도로 장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곡식과 옷을 내리는등의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애민 정책이 있으나 너무 많아 건건이 다 글로 설명하기는 힘드니 대표적인 것만 추려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음악과 제례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긴 세종인데, 특히 절대음감에 가까운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흔히 한글은 집현전에서 집필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한글은 순수하게 세종이 혼자 창제한 언어이며 집현전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어서 배포한 일이 전부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한반도 역사상 둘도 없을 천재가 바로 세종이었으며 언어라는 것이 하루이틀 고민한다고 창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세종의 천재성이 더욱 더 두각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 한글은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을 가늠해본다면 더욱 더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할 수 있는데 사대의 예를 중시하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제한다는 것은 곧 사대의 예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글을 연구해야 했으며 이를 혼자서 완성한 세종대왕의 업적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소리나는 대로 읽을 수 있는 한글의 위대함은 여전히 인정받고 있는 부분이니 당시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한 결심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빛나는 결단이자 업적 중 하나라고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업적들이 있으며 이러한 치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세종은 하루에 5시간의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격무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모든 업무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강한 학구열로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찌보면 건강이 좋은게 더 이상할 노릇입니다. 때문에 세종은 건강은 물론 시력까지 말년에는 거의 잃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자치통감이라는 해석본을 편찬하는 것으로 모든 작업에 참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책과 눈을 바꾼 것과 다름이 없었으나 이 해설본도 세종이 승하하고 난 후 문종 2년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종의 업적은 물론 생애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흠결이 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완전체에 가까운 무결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업적들이 모두 후세에 길이남아 아로새길정도의 치적이라는 것을 보면 세종 스스로 얼마나 완벽주의자였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한반도 역사에 두번은 안나올 성군 중의 성군이며 하늘이 내린 임금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백성에게는 진정한 지아비였으나 신하들에게는 악독한 상사였겠으나 결과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들을 많이 남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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