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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상 가장 성군이었던 세종이 아버지이자 조선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단종의 아버지, 5대 임금 문종의 이야기입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8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약 8살이 되던 해 세자로 책봉이되고 세종의 말년에는 건강이 위독한 부왕을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세종의 뒤를 이어 5대 임금으로 즉위했으나 2년만에 승하하며 어린 아들인 단종만 홀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유정난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계유정난에 대한 이야기는 단종과 세조의 문서에서 다루겠으며 조선 초기 전성기를 마지막으로 구가한 임금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문종은 조선 왕조 최초의 적장자 출신의 임금입니다. 문종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세종이 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세손은 아니었으므로 옥좌와는 거리가 꽤 있었으나 세종인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이 되면서 임금의 자리와 가까워지기도 한 인물입니다.
흔히 문종은 단명을 했다는 이유로 병약했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사실 문종은 완벽한 정통성과 더불어 총명함으로 인해 많은 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는 세자시절을 보냈습니다.
세자시절만 약 29년을 보내면서 단 한번도 세종을 실망시킨 적도 스스로 흠집이 될만한 행동을 한적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총명함으로 인해 세자의 자리는 굳건했으며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동생도 문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꼼짝도 못했을 것입니다.
즉, 본인에게는 한없이 착하기만 한 동생들이었기 때문에 딱히 다른 왕자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못느꼇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본인이 단명하면서 어린 아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본인의 형제들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겁니다.
문종의 생애
세종의 치세가 시작된지 3년이 지났을 때 문종은 왕세자로 책봉이 되었습니다. 약관의 나이를 넘어 성인이 되었을 때는 부왕인 세종을 도와 직접 실무를 하며 총명함을 뽐냈다고 합니다. 이미 유교적 지식은 물론 역산과 천문, 병법등에도 모두 조예가 깊었던지라 세종시절에 완성된 측우기가 바로 세종의 작품이 아닌 문종의 작품이라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대목입니다. 특히 세종의 말년인 약 세종 27년부터는 문종이 세자로써 7년동안 대리청정을 하게 되는데, 이는 곧 세종의 치세 말기에 이룬 업적들은 대부분 문종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종과 문종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은 역사적으로 손꼽을 만한 모범적인 대리청정의 사례로도 활용될 수 있을만큼 완벽하게 계승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세종이 승하하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나 단명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문종이라는 묘호와 함께 병약하고 문약한 임금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중 병약은 그런대로 맞다고 할 수 있어도 문약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인즉슨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부터 정책을 다수 펼쳤으며 이 기간동안 이룬 업적은 물론 임금이 되고 나서도 언론 활성화, 병법 정비, 역사책 편찬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문종이 관심을 가지고 발달시킨 것이 바로 군사부문인데 경연에서조차 병서를 이용하자고 했을 정도로 군사에 관심이 많았던 임금입니다. 문종이 편찬한 것이 병장도설, 동국보감이며 군사장비에도 깊은 지식이 있었는지 화차를 개발해서 운영법을 정하고 진법을 짜는 방법도 치밀하게 고안해낸 임금이 바로 문종이므로 문약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계유정난이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 문종의 행동을 꼽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 문종이 살아생전에는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의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신권을 강화시켜 왕족을 견제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믿을 수 있는 김종서, 황보인, 정분등의 고명대신들로 하여금 단종의 보좌를 부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명분상 신하들이 임금을 농락한다는 것으로 일어나게 되면서 소수의 왕족들에게 지지를 받게 되는 아이러니함이 발생했지만 말입니다. 재위기간이 짧은 문종의 특성상 단종과 연관을 지을 수 밖에 없는데 단명한 문종이 약 5년만 더 치세기간을 가졌더라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무참히 끌어내려질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문종이 보기에는 수양대군의 세력은 가장 보잘것 없었으며 실질적으로 신하들이 적자인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을 지지한 것도 이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세력기반이 약한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켜 왕권을 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계유정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종은 세명의 세자빈을 들였으나 모두 이런저런 사유로 폐위되거나 요절하여 문종이 승하할 당시에 아들인 단종을 보살펴줄 내명부의 어른들이 부족했던 것도 계유정난의 사유로 꼽을 수 있습니다. 사실 문종은 세종말기 대리청정기간이나 어린시절의 기록을 봤을 때 역사적으로 세종대왕에 비견될만큼의 성군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2년의 치세기간을 가진 후 승하했으므로 여러모로 아쉬운점이 많은 임금입니다. 특히 세종말기의 치세기간이 대부분 문종의 대리청정으로 이뤄진 것을 생각해본다면 실제 문종의 치세는 약 10년이상으로 봐야하고, 그 기간동안 여러 치적을 남긴점으 높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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