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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이유의 왕위 찬탈

quickforinformation 2023. 3. 16. 14:07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수양대군은 문종의 동생입니다. 즉, 6대 임금인 단종이 조카이고 아버지가 세종이었으니 태어난 이후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다가 몇년 후 함평대군으로 개봉되고 그리고 다시 며칠뒤에 진양대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최종적으로 수양대군으로 개봉됩니다.

대군호를 총 3번을 바꾸면서 4개의 군호를 가진 왕족이었는데 이런 경우는 상당히 드문 현상이라고 합니다. 세조가 임금이 되는 과정은 모두가 잘 알고있는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입니다.

세조라는 이름보다 수양대군이라는 이름이 더욱 유명한데 이는 대군호를 자주 바꾼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으나 김종서나 황보인과 대립하던 수양대군의 모습을 각종 매체에서 인상깊게 다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차남으로 태어났기에 형인 문종 다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으며 실제로 문종이 후사를 보는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리면서 그 시간동안 병약했던 문종을 보면서 옥좌에 대한 욕망이 어느정도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단종이 태어나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옥좌를 차지 할 수 없게된 수양대군으로써는 이후에 벌어지는 계유정난이라는 것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문종에 가려 빛을 못본 것도 있으나 세조는 문과 무를 모두 겸비한 인재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형인 문종이 더욱 더 큰 인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려졌을 뿐 독서를 좋아하고 활쏘기도 잘했으며 음악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세조의 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발군인 것은 바로 필체인데, 상당히 뛰어난 명필이었다고 합니다.

세조의 생애

흔히 세조는 할아버지였던 태종 이방원과도 종종 비교가 되는 모습인데, 이는 가족간에 혈투를 딛고 임금이 된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일뿐 실상은 태종과 전혀 비교도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숙청했고, 그것이 설사 본인의 측근이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임금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측근들을 감싸고 돌았으며 실제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공신들의 도움을 받은 세조는 제대로 된 왕권을 구사하지 못한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는 문종이 생존해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본인의 처세를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문종의 능력때문인데 그야말로 성공가도만 달려온 문종은 아버지인 세종에 비견될만큼 성군의 자질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를 뒷받침해줄만한 본인의 능력도 출중했습니다.

그에반해 세조도 능력은 있으나 형에게는 한수 접어야 했으며 동생인 안평대군에 비해서도 그렇게 티가나지 않은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본인의 야심을 드러냈다가는 숙청당알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을 어느정도 감추고 살아남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드라마나 사극과 같은 곳에서 보이는 문종의 병약한 모습은 실제 문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병약했던 인물이 아니라 3년상을 연거푸 치르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문종이 임금으로 재위하던 시절의 어의 또한 실력이 없었다는 것을 실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어의가 실력이 있었더라면 문종은 아마 몇년은 더 살거나 아예 죽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어쨋거나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한 이후 약 1년만에 계유정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고명대신이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숙청하고 동생인 안평대군마저 역적으로 몰아 척살하게 됩니다.

이후 각종 요직에 본인의 측근을 앉히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조카인 단종을 압박하게 됩니다. 즉, 계유정난이 발생한 이후 약 2년만에 양위를 받아 7대 임금으로 즉위했으며 이후로도 단종복위운동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다가 결국 상왕이던 단종을 폐하고 노산군으로 강등한 뒤 유배를 보낸뒤 그곳에서 죽게만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을 거치고 세조에게 남은 것은 조선역사상 가장 친족의 피를 많이 묻힌 임금이라는 것이 후대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복형제는 물론 동복 형제까지도 무참하게 죽였으며 이는 최악의 폭군인 연산군도 명함을 못내밀 정도입니다. 또 세조가 즉위하던 나이가 39세이니 태조와 정종에 이어 세번째로 나이가 많은 임금입니다.

그러나 조선 초기 건국과정에서 즉위가 늦은 태조와 정종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가장 늦은 나이게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조의 업적

이런 패륜아적인 성향이 짙은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 있습니다. 바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것을 시작한 일인데, 세조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된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의 치세시절 호전과 형전이 완성되었으며 이후 어려방면의 법전에 대한 수정을 하면서 성종 15년에 반포되었습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편찬한 일은 세조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방면으로 힘을 쓴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들의 측근인 공신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이후 훈구대신으로 발전한 이 공신들이 왕권을 견제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조대에는 본인이 직접 왕권을 강화하여 신하들의 권력을 억눌렀으나 세조이후의 임금들은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히려 권신들에게 왕권을 제약당하게 됩니다.

또한 세조를 폭군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세조는 패륜아는 맞으나 폭군까지는 아닙니다. 민생에 관심을 가진 흔적도 꽤 있고 수령 고소 금지법을 폐지하는등 지방의 토호를 견제하고 민생을 돌보는데에도 신경을 썻습니다.

하지만 세조에게는 가장 큰 결점이 있었으니 바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정통성이 너무나도 미약하단 것입니다. 본인이 밀어낸 조카가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뛰어난 임금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차남인데다가 조카를 밀어내고 옥좌를 차지한 세조에게 정통성이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단종이 연산군과 같이 폭군이었으면 모를까 어린나이탓에 제대로 된 친정도 못하고 고명대신들이 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평가자체가 불가능한 임금을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세조를 지지해주는 세력이 훈구세력밖에 없었으므로 세조 또한 훈구대신들이 싫어도 안고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외에도 세조의 업적으로는 진관체제, 직전법 실시, 잠실, 역대병요, 면리제, 한글 및 서적 보급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세조는 확실히 아버지인 세종이 있을 때부터 야망을 드러냈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견제를 받지 않아 운이 좋게 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세종 혹은 문종 혹은 단종이 몇년만 더 살았더라도 세조는 절대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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